6장 재림교회와 영혼 문제 그리고 지옥에 대한 질문
질문 75 예수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도하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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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베드로전서 3:17-22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 성경절은 신약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난해 구절에 속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영혼 불멸의 근거가 되는 성경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자세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언뜻 보면 이 성경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부활하시기 전까지 그의 영혼이 그때까지 지옥에서 고통당하던 노아 당시에 멸망했던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전도하신 것으로 잘못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노아 당시 사람들의 영혼이 예수님 부활 당시까지 2,500여 년 동안이나 지옥에 있었다면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틀림없게 됩니다. 그들의 육체는 홍수에 멸망당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불멸이라는 이론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죽는 사람들도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각각 천국과 지옥에 간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문제는 이미 죽어 지옥에 있는 사람에게 다시 복음이 전파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두 번째의 기회가 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실제로 노아 당시 멸망한 영혼들에게 전파하셨다면 멸망받아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연옥설의 중요한 기본 성경절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있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시도된 해석들과 그 문제점들
1) 첫 번째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육체는 요셉의 무덤에 두신 채 예수님의 영만 지옥에 가셔서 노아 시대 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전도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연옥설의 근거가 되어 연옥을 믿는 교회의 지지를 받아 왔으나 위에서 밝힌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즉 죽은 다음에 영으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영혼불멸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호하며,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는 연옥설이 성경의 전체적인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노아의 날에 죄악의 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그 당시 사람들을 회개 시키기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였으나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명이었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교리와 위배되지 않는 가장 좋은 해석이나 왜 고난받는 수신자들에게 노아 방주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야 됩니다.
어느 성경절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책 전체의 배경과 저자의 기록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글을 읽을 수신자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도 숙고해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자가 왜 그런 내용을 기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뿐더러 저자가 의도했던 원래의 의미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앞뒤 문맥을 생각지 않고 해당 구절만 떼어 내어 해석하려고 할 경우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베드로가 목회자적인 심정으로 쓴 편지서입니다. 그 당시 교회는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시련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인들이 오히려 득세하고 잘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충성스럽게 살려고 애쓰지만 몰려오는 시련으로 구원의 확신도 흔들리고 상심되어 신앙생활까지도 약해진 신자들을 위하여 베드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로 들어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애매한 고난을 당하셨고(벧전 2:21-25) 불의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벧전 3:18-22)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오히려 기뻐할 일이며(벧전 4:12-19)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잠깐 고난을 받는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임을 말하여(벧전 5:10, 11)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따라서 베드로전서의 모든 내용은 이런 고난과 핍박이라는 조명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8은 헬라어 성경에서 왜냐하면(ὅτι)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18 이하는 3:17의 설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3:18-22의 말씀은 3:17의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도 낫다는 구절을 예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선을 행하지만 여전히 고난과 핍박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당시의 성도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생기는 고난이, 당시에는 참기 어려워 보이나 반드시 열매를 맺고 만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예를 들어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3:18의 “그리스도께서도”라는 문구가 그리스도께서도 선을 행하셨으나 고난을 받으셨다는 예를 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림을 받으셨”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우선 “영으로 부활하셨다”의 “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여기서 “영”이란 “육체”의 반대 개념으로서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자신이 영이 아니라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그렇다면 영으로 살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성령을 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17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영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사도행전 2:17에는 하나님께서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4에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하는데 옥에 있는 영들이란 누구일까요?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벧전 3:20)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감옥에 있다고 했습니까? 여기서 옥이란 지옥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옥(獄)이란 어떤 공간을 뜻하지 않고 영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즉 성경에서 옥이란 이 죄악 세상을 상징하는 데 쓰였습니다. 다윗은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시 142:7)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의미하는 옥이란 실제의 감옥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거기는 주의 이름을 감사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곳이요 갇혀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보면 옥은 절망적인 이 죄악 세상이기도 하고 혹은 불의와 욕망으로 얽혀 있는 죄의 감옥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노아 당시 노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만히 계시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령과 함께 친히 그토록 전파하셨으나 구원받은 사람이 겨우 8명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물로 멸망을 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함께 일하셔도 그렇게 적은 결과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노아의 8식구 외에 온 인류가 멸망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그런 고통을 참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고난의 대가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낙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했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온다고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 성경절의 기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그를 부활시키신 강력한 성령으로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명인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 성경절은 신약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난해 구절에 속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영혼 불멸의 근거가 되는 성경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자세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언뜻 보면 이 성경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부활하시기 전까지 그의 영혼이 그때까지 지옥에서 고통당하던 노아 당시에 멸망했던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전도하신 것으로 잘못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노아 당시 사람들의 영혼이 예수님 부활 당시까지 2,500여 년 동안이나 지옥에 있었다면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틀림없게 됩니다. 그들의 육체는 홍수에 멸망당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불멸이라는 이론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죽는 사람들도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각각 천국과 지옥에 간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문제는 이미 죽어 지옥에 있는 사람에게 다시 복음이 전파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두 번째의 기회가 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실제로 노아 당시 멸망한 영혼들에게 전파하셨다면 멸망받아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연옥설의 중요한 기본 성경절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있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시도된 해석들과 그 문제점들
1) 첫 번째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육체는 요셉의 무덤에 두신 채 예수님의 영만 지옥에 가셔서 노아 시대 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전도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연옥설의 근거가 되어 연옥을 믿는 교회의 지지를 받아 왔으나 위에서 밝힌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즉 죽은 다음에 영으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영혼불멸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호하며,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는 연옥설이 성경의 전체적인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노아의 날에 죄악의 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그 당시 사람들을 회개 시키기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였으나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명이었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교리와 위배되지 않는 가장 좋은 해석이나 왜 고난받는 수신자들에게 노아 방주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야 됩니다.
어느 성경절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책 전체의 배경과 저자의 기록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글을 읽을 수신자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도 숙고해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자가 왜 그런 내용을 기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뿐더러 저자가 의도했던 원래의 의미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앞뒤 문맥을 생각지 않고 해당 구절만 떼어 내어 해석하려고 할 경우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베드로가 목회자적인 심정으로 쓴 편지서입니다. 그 당시 교회는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시련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인들이 오히려 득세하고 잘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충성스럽게 살려고 애쓰지만 몰려오는 시련으로 구원의 확신도 흔들리고 상심되어 신앙생활까지도 약해진 신자들을 위하여 베드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로 들어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애매한 고난을 당하셨고(벧전 2:21-25) 불의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벧전 3:18-22)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오히려 기뻐할 일이며(벧전 4:12-19)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잠깐 고난을 받는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임을 말하여(벧전 5:10, 11)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따라서 베드로전서의 모든 내용은 이런 고난과 핍박이라는 조명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8은 헬라어 성경에서 왜냐하면(ὅτι)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18 이하는 3:17의 설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3:18-22의 말씀은 3:17의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도 낫다는 구절을 예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선을 행하지만 여전히 고난과 핍박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당시의 성도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생기는 고난이, 당시에는 참기 어려워 보이나 반드시 열매를 맺고 만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예를 들어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3:18의 “그리스도께서도”라는 문구가 그리스도께서도 선을 행하셨으나 고난을 받으셨다는 예를 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림을 받으셨”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우선 “영으로 부활하셨다”의 “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여기서 “영”이란 “육체”의 반대 개념으로서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자신이 영이 아니라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그렇다면 영으로 살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성령을 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17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영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사도행전 2:17에는 하나님께서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4에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하는데 옥에 있는 영들이란 누구일까요?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벧전 3:20)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감옥에 있다고 했습니까? 여기서 옥이란 지옥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옥(獄)이란 어떤 공간을 뜻하지 않고 영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즉 성경에서 옥이란 이 죄악 세상을 상징하는 데 쓰였습니다. 다윗은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시 142:7)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의미하는 옥이란 실제의 감옥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거기는 주의 이름을 감사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곳이요 갇혀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보면 옥은 절망적인 이 죄악 세상이기도 하고 혹은 불의와 욕망으로 얽혀 있는 죄의 감옥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노아 당시 노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만히 계시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령과 함께 친히 그토록 전파하셨으나 구원받은 사람이 겨우 8명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물로 멸망을 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함께 일하셔도 그렇게 적은 결과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노아의 8식구 외에 온 인류가 멸망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그런 고통을 참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고난의 대가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낙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했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온다고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 성경절의 기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그를 부활시키신 강력한 성령으로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명인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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