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함과 부드러움 사이의 위대한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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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이든 통치든 사회 활동이든 육아든 강함과 부드러움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질 때 좋은 결과가 나온다. 강함에는 규칙, 법, 정의, 질서, 준수, 안정, 우선순위, 규율이 포함되고, 부드러움에는 동정, 용서, 이해, 공감, 세심함, 전후 사정, 자비가 들어간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제대로 잡으면 극단적인 상황을 막을 수 있다. 너무 강경하면 부러지는 반면에 너무 무르면 배움과 변화와 발전이 없다. 어떻게 해야 이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경미한 교통 법규 위반으로 단속에 걸렸다고 치자. 이때 제시되는 것은 ‘강함’ 즉 법이다. 이에 대해 균형을 잡아 주는 것은 위반에 상응하는 범칙금일 것이다. 하지만 임산부를 급히 병원에 데려가느라 과속했을 경우에는 강함을 상쇄하는 ‘부드러움’을 제시해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자동차 후미등을 파손한 사람의 손가락을 자르는 것이 법이라면 이것은 균형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14중 추돌사고를 일으키고도 사과 한 번으로 끝나는 게 법이라면 이 또한 불균형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법의 역사에서는 올바른 균형을 찾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이교 신앙에서도, 현대 사회 과학에서도, 각 시대의 철학자들도 균형을 추구해 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 골치 아픈 질문을 얼렁뚱땅 넘어간다. 대중문화는 관심을 끌기 위해 극단을 제시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강함과 부드러움 사이의 균형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 주고 있다. 대쟁투라는 거대 담론의 이해와 관련해 (분명히) 재림교회는 가장 폭넓은 빛에 의거한 우주적인 관점에서 이 위대한 균형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곳이다. 여기서 선과 악이 완전히 폭로된다. 여기에는 평화와 고통이 공존한다. 십자가는 구원이자 심판이다. 아름다움이자 공포이다. 영예이자 굴욕이며 존엄하면서도 참혹하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정의를 드높이기에 강하면서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에 부드럽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
십자가를 묵상하면 부모는 균형지고 다정하게 훈육하는 통찰력과 인내를 얻을 수 있다. 교회는 교인 징계 시에 구제에 초점을 두고 관용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 합회는 목회자와 교회를 대할 때 공정하면서도 동정을 베풀 수 있다. 연합회는 기관을 운영하면서 그리스도의 계명과 성품을 실천할 수 있다. 세계 교회와 지회는 가장 성실하면서도 가장 넓은 동정을 베풀며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행할 수 있다.
이 균형은 우리 안에서 얻는 게 아니다. 지식이나 문화, 경험에 내재된 것이 아니다. 그 근원은 우리 밖에 있는 위대한 기초에서 발견된다. 바로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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