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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 들리는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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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월호 2024년 12월호 이야기 꾸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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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 들리는 음성



빅터는 몇 개월째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옆 기둥에 칼로 금을 그으며 지나가는 날짜를 세었다. 이제 곧 12살이 되는 것을 기억하고자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해 온 행동이다. “12살이 되어야 비로소 남자가 되는 거야.” 전에 아빠가 빅터에게 말씀하셨는데 아직 그날이 되려면 한 달이나 남았지만 마음의 준비는 벌써 되어 있었다.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생일이 지나면 크리스마스다.

빅터는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가 시킨 일들을 척척 해내었다. “닭 모이를 주고, 달걀도 모아 놔. 개에게 먹이를 주고 난로가 꺼지지 않게 나무를 충분히 가져다 놓으렴.” 일이 끝나면 또 할 일이 생기고 또 생겼다.

하루에 2~3시간만 온전히 ‘자신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애완견 패치와 뉴멕시코주의 메사(꼭대기는 평평하고 등성이는 벼랑으로 된 언덕)를 탐험하기 위해 따로 챙겨 두었다.

가장 높은 메사 위에는 고대 유적이 있었다. 나바호족과 주니족 친구들이 ‘엘 모로(요새)’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빅터는 종종 좁은 틈을 이용해 메사에 올라가 그 꼭대기에 있는 허물어져 가는 붉은 사암 벽 사이를 탐험하곤 했다.

빅터에게도 크리스마스에 꼭 갖고 싶은 것이 생겼다. 진짜 북미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활과 화살 세트였다. 엄마의 허락도 받아 놓았다. 라마의 작은 마을에 있는 톰 아저씨의 교역소(물물 교환 장소) 뒤쪽 벽에 걸려 있었다. 아빠와 마을에 갔을 때 직접 손에 쥐어 본 적도 있었다.

드디어 생일날 아침에 일어나 기둥에 마지막 금을 새겨 놓고 그 옆에 선명하게 ‘12’라고 숫자를 새겨 넣었다.

“이제 오늘부터 나도 남자야.” 빅터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남자가 되었으니 해야 할 일들을 훨씬 더 빨리 끝내야겠네.” 엄마가 웃음 지으며 말했다. 아빠가 한 달간 작업복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봉투를 빅터에게 건네주었다.

봉투 안에 얇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 윗부분에 앨버커키에 사는 삼촌의 이름과 주소가 있었다. 그리고 종이 아래에는 삼촌의 사인이 적혀 있었다. 또 중앙에 ‘빅터’라는 이름과 ‘10달러’가 적혀 있었다.

“이게 수표예요 아빠?”

“물론이지. 삼촌이 두서너 달 전에 보내 주셨어. 그런데 생일까지 기다렸다 주라고 하셨단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을 찾기 바란다는 말도 전해 주라고 하셨어.”

빅터는 침대 옆 통나무 사이에 깎아 만든 특별한 은폐 장소에 수표를 간직해 두었다. 가끔 수표를 꺼내 보며 새 활과 화살로 바꾸는 상상을 했다.

아빠가 물건을 교환하러 라마로 가는 12월 12일을 기다리는 일이 빅터에게는 가장 어려웠다. 드디어 라마로 가는 날 아침이 되자 빅터는 얼른 달려가 말을 짐수레에 매고, 두 개의 큰 담요를 마차 좌석에 얹고, 20개의 자루를 마차의 짐칸에 실은 뒤 자루들이 마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다. 엄마가 적어 준 물건 목록이 길었지만 빅터의 머릿속에는 온통 크리스마스 활과 화살 그리고 호주머니 속에 있는 ‘10달러짜리 수표’ 생각뿐이었다. 

라마로 가는 길은 소나무 사이로 마차가 겨우 흔들리며 지나갈 만큼 좁았다. 빅터는 자주 마차에서 내려 길을 막고 있는 두꺼운 나뭇가지를 치워야 했다. 팔은 아프고 손에는 나무 가시가 박혔다. 밤에 야영할 곳을 마련하기도 전에 빅터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라마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 빅터는 말들을 돌본 뒤 교역소에 있는 아빠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아빠도 톰 아저씨도 보이지 않았다. 두 분 모두 밖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센 눈폭풍이 몰려오다 

“몇 년 전 큰 눈보라가 닥친 이후 처음 보는 눈폭풍이겠는데.” 톰 아저씨가 말했다. “눈보라가 마차를 날려 버리기 전에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야겠군요.” 톰 아저씨는 엄마가 적어 준 물품들을 챙기는 아내를 소리 내어 불렀다. “마벨, 나와서 하늘을 좀 봐요. 눈폭풍이 몰려오고 있어요.”

톰 아저씨의 말이 맞았다. 남쪽 하늘이 서서히 먹구름으로 덮이는 모양이 그냥 비가 아니었다. 벌써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이 마차를 흔들고 있었다.

빅터는 물건을 넣은 마대 자루들을 수레에 싣고 쌓느라 너무 바빠서 활과 화살은 찾아보지도 못했다. 아빠와 톰 아저씨가 짐을 계속 건네주는 바람에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아빠가 톰 아저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빅터는 매어 놓은 말을 풀었다. 소리치며 말 등에 채찍을 휘둘러 마을을 황급히 벗어나 달렸다. 마을 밖 소나무 길로 접어들어서야 10달러 수표가 생각났다.

‘이제 너무 늦었네.’ 빅터는 생각했다. ‘내년까지 기다릴 수밖에.’

“아들, 눈보라가 지나갈 때까지 라마에서 기다리면 좋겠지만 엄마와 여동생만 있고 또 마차에 있는 물건들이 모두 엄마에게 필요할 테니 가야겠지?”

빅터는 잠깐 생각을 하고 바로 말을 더 빨리 몰았다.

일몰과 함께 눈보라가 몰아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눈에 덮여 버려 하얀 언덕이 나무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같았다. 두꺼운 얼음 같은 눈이 길가로 휘몰아치며 도로는 얼음 담요 아래 숨어 버렸다. 빅터는 말들을 독촉하며 엄마가 있는 거실의 따뜻한 난로를 떠올렸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말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듯 보였기에 빅터는 말들에게 길을 맡겼다. 가끔씩 말들을 다시 제대로 된 길로 이끌었다.  

그러다 번개가 번쩍일 때 끔찍한 진실이 드러났다. 빅터가 이끄는 말들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었다. 방금 지나고 있는 길은 약 한 시간 전에 지나간 곳이었다. 아빠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려고 고개를 돌려 보니 아빠는 옆 좌석에서 추위에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오, 하나님!” 빅터가 크게 외쳤다. “제발 저희 아빠를 깨워 주세요.”

빅터는 눈보라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경험으로 알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았다. 성경에서 빅터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시편 23편이었다. 물론 눈이나 눈폭풍 그리고 아빠가 추위에 의식을 잃어 가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마차를 몰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 목자이신 주님이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이 현재의 상황과 맞물려 떠올랐다.

시편을 생각하고 있는데 빅터에게 멈춰서 불을 피우라는 음성이 들렸다. ‘불을 피워 아빠를 깨워야 한다.’라는 소리였다.

방향 때문에 빅터만큼이나 혼란스러워진 말들도 멈추기를 반기는 듯했다.


수표가 있었지

언젠가 빅터의 나바호족, 주니족 친구들이 피뇽 소나무의 큰 가지 아래에 있는 건조한 불쏘시개 가지를 찾는 법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여기 보면 마른 가지가 항상 있어. 그러니 성냥을 챙기는 걸 잊지 마.” 친구들이 말해 주었다.

빅터는 우선 아빠에게 담요를 하나 더 덮어 주고 길가 피뇽 소나무 아래서 마른 가지를 찾기 위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사납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불을 피우기 위해 마른 가지를 쌓았다. 그리고 성냥을 찾으려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성냥이 없었다.

‘아빠의 호주머니를 찾아보거라.’ 하는 음성이 들렸다.

아빠의 코트 오른쪽 주머니 깊숙한 곳에 나무 성냥 3개가 있었다. 하나는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이젠 됐어.” 빅터는 생각했다. “이제 나무와 성냥은 있는데 불을 지필 종이를 어디에서 찾지?”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네게 10달러짜리 수표가 있잖니.’

“안 돼. 수표는.”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빅터가 외쳤다. “그건 내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말이야.”

‘마른 수표라니?’

빅터는 호주머니를 뒤지며 이제 크리스마스 활과 화살은 영영 받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빠가 마차에서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활과 화살은 잊어버리자.” 빅터는 자기에게 속삭이는 음성에게 말했다. “불을 피워 아빠를 구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호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넣어 크리스마스 선물인 수표를 찾았다.

이제 불만 지피면 된다.

첫 번째 성냥을 켰다. 그런데 수표 끝에 불을 지피기도 전에 성냥이 꺼져 버렸다. 두 번째 성냥은 젖어서 못 쓰게 되어 버렸다. 마지막 두 동강이 난 성냥을 조심스럽게 부츠 밑창에 대고 그었다. 성냥은 밝은 오렌지색 불꽃을 일으켰고 곧 수표를 태우기 시작했다. 빅터는 타오르는 종이를 얼른 나뭇가지 사이에 끼워 넣으며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에게 외쳤다.  

“제발 아빠가 깨어나게 도와주세요.”

눈보라 속에서 불을 지피는 일은 힘들었다. 하지만 곧 빅터는 아빠를 따뜻한 불 옆에서 안아 줄 수 있게 되었다.

“여기가 어디니?” 아빠가 깨어나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하나님은 아실 거야.” 아빠의 작은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했다. “그분께 여쭤 보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빅터는 하나님이 가까이서 들으시기를 바라며 가능한 한 크게 그 성경절을 외쳤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오른쪽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렴.’ 하는 음성이 들렸다.

빅터는 일어나 아빠의 어깨를 토닥이고 모자를 눌러쓴 뒤 나무를 향해 걸었다.

바로 그 순간, 폭풍이 잠시 멈추며 보름달 빛이 비쳤다. 그 짧은 순간이 단 몇 초 동안이었지만 빅터는 그 사이에 번개로 상처 입은 오래된 폰데로사 소나무의 갈라진 꼭대기를 볼 수 있었다. 빅터는 그 나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사는 땅 모퉁이에 있었다. 그 나무에 도달하고 나서 엘 모로 쪽으로 열 걸음만 걸으면 아빠가 쳐 놓은 철조망과 마주칠 것이다. 거기서 집까지는 약 1마일 거리였다. 

“아빠!” 빅터가 소리치며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셨어요. 이제 집에 갈 수 있어요.”


딕 더크슨 목사이자 이야기꾼으로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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