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침번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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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라스 바부 나카의 이야기
프라탑 고팔라 라오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촛불을 밝히는 것이 낫다.” 이 말은 샤라스 바부 나카에게는 멋진 격언 이상으로 놀라운 삶을 이끄는 원칙이 되었다.
샤라스 바부 나카는 인도의 푸네에 자리한 스파이서 재림교회 대학의 신학과 선교학 교수이다. 지난 55년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아왔지만 신체 장애는 그를 단념시키지도 그의 삶에 대한 열정을 빼앗지도 못했다. 도리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매일 희망과 기대감으로 열렬히 하루를 맞이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가장 긍정적이고 명랑한 그리스도인이다.
최근 인도를 방문했을 때 그가 집 밖으로 나와 신선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아, 정말 아름다운 날이군요!”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지만 우리 중 눈이 있어도 주변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보다 그는 더 분명히 보고 있었다. 시편 118편 24절은 그의 삶에 대한 태도를 가장 잘 요약한다. “이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기쁨을 누리는 날이 오늘이 되어야 한다. 내일이 아니다. 그다음 날이나 언젠가 삶이 완벽하고 아름다워질 먼 미래의 시간이 아니다. 삶의 어려움과 낙담 가운데 맞이하는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그렇게 샤라스 바부의 기쁨은 상황에 좌우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과 신실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고 없이 닥친 일
샤라스 바부는 인도 남부 안드라프라데시주에 자리한 외딴 마을 스리랑가파트남에서 자랐다. 무성한 초록 논과 풍성한 코코넛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은 초가지붕을 얹은 진흙 오두막이 듬성듬성 흩어져 있고 집들이 좁은 흙길로 이어진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전기나 실내 배관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무슨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소년이었던 바부는 꿈꾸는 아이였다. 언젠가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80km나 떨어진 나르사푸르에 있는 재림교회 기숙학교를 찾게 되었다. 그곳 재림교회 학교에서 바부는 뛰어난 학업 성과를 거뒀다. 삶과 학교를 사랑하는 소년에게 유망한 미래가 보장된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사건이 일어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두 눈의 시력을 잃은 아이는 하룻밤 사이에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어둠의 세상으로 내던져졌다.
마을의 재림교회 목사인 아버지 수바카라 라오 나카와 어머니 카말라라트남의 네 자녀 중 맏아들이자 외아들로 태어난 샤라스 바부는 부모의 자부심이자 노년을 위한 기둥이었다(인도 문화에서 아들은 모든 것을 의미했다.). “그때 저는 겨우 10살이었지만 그날 일어난 모든 일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특히 슬퍼하시는 부모님을 향해 “제발 울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저를 돌봐 주실 거예요.”라고 도리어 부모님을 위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을 의사들은 당황했고, 650km 떨어진 벨로르에 있는 크리스천 메디컬 칼리지 병원으로 아이를 보냈다. 그곳에서 인도 최고의 안과 전문의들이 샤라스 바부의 치료를 맡았다. 수술실 밖에서는 아버지가 기도하며 하나님께 기적을 간청했다. 하지만 사탄도 그를 조롱하며 속삭였다.
‘당신은 목사면서 기도의 사람이 아닌가? 이 상황에 당신의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지? 필요할 때 당신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지? 당신의 아들이 시각 장애를 안고 평생 마을의 흙길이나 기차역에서 구걸하도록 저주받은 것을 어떻게 견딜 텐가? 차라리 아들과 함께 죽는 게 낫지 않겠어?’ 인도와 같은 곳에서 시각장애인의 비참한 처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인도는 세계에서 시각장애인과 시각 손상자가 가장 많은 나라로 곳곳에서 배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동전이나 빵 조각을 구걸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샤라스 바부는 아버지가 그날 스스로 목숨을 끊을 뻔했다고 나중에 자기에게 고백했던 일을 회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그날 아버지 귓가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병원 복도 끝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답고 감미로운 찬양 소리였다. 이 병원의 직원과 환자가 매일 아침과 저녁에 함께 모여 노래하고 기도하는 소리였다. 타밀어로 부르는 찬양이었지만 가사 몇 구절이 또렷이 들려왔다. ‘시련과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 그대를 이끌어 주시리.’
그 노래의 메시지와 아들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힘입어 아버지는 믿음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를 집으로 데려가세요.” 의사들이 말했다. “아드님의 시력을 회복할 방법은 없습니다. 시신경이 완전히 손상됐고 우리가 지금까지 본 사례 중 최악입니다. 이 아이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막 시작되려던 소년의 꿈은 잔인하게 산산이 부서졌다. 그의 앞에는 끝없이 이어진 황량한 사막처럼 절망과 낙담만이 펼쳐져 있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
샤라스 바부는 어두운 고통의 시간에 갇혀 2년 동안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섭리로 그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각장애인 기독교 학교에 가게 되었다. 이 학교는 오순절 교단에서 운영하고 있었고 그에게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곳에서 5년 동안 점자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면서 기본적인 생활 기술을 익혔다.
7학년을 마칠 무렵이 되자 이미 18살이 되었지만 우수한 학생이었던 그는 두 학년을 건너뛰어 바로 10학년으로 진급했다. 그해 주에서 시행하는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치렀고 합격했다.
이후 그의 다음 목적지는 스파이서 메모리얼 대학(현 스파이서대학교)이었다. 당시 인도에서 유일한 재림교회 대학인 이곳은 그의 집에서 약 1,00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완전히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일은 그에게 큰 도전이었다.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했고 강의실, 교회, 도서관, 식당 등으로 갈 때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도움을 받아야 했다.
대학 측에서는 상급 학생을 배정해 그가 학업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독서와 숙제를 도왔다. 강의실에서는 녹음기로 강의를 녹음하며 수업을 따라갔다. 3학년이 되자 그는 점자에 익숙해져 교수님의 수업을 완벽히 따라갈 수 있었다. 강의 노트가 매우 상세하고 체계적이어서 동급생들이 자주 빌려달라고 할 정도였다.
모든 과외 활동과 방해에서 본의 아니게 차단되다 보니 오롯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매 학기 19학점씩 등록하고 여름 학기까지 수강하며 샤라스 바부는 3년 반 만에 신학 학사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자리를 제안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근처 공립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인생에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해 앤드루스대학교는 스파이서대학교 캠퍼스에서 신학 석사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샤라스 바부는 이 프로그램에 입학한 첫 번째 스파이서대학 졸업생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85년에 ‘힌두교에 나타난 구원의 개념’이라는 제목의 석사 논문으로 졸업했다. 일자리를 제안하는 곳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배후에서 그를 인도하고 계셨다.
1990년 6월 21일은 샤라스 바부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는 대학 방송으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소리를 들었다. 즉시 총장실로 오라는 말이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곧 사라졌다. “샤라스 바부, 하나님께는 자네의 삶을 위한 계획이 있으시네. 그러나 그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네.”라고 대학 총장이었던 고(故) M. E. 체리안 박사가 말했다. “그동안 자네에게 일자리를 제안하고 싶네. 올해 몇몇 교수님이 떠났고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하거든. 내일부터 신학과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 주게.” 34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그 모든 가르침의 순간을 사랑한다. 힌두교의 이해를 포함해 종말론,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교회사, 안식일 교리 등은 그가 즐겨 가르치는 과목들이다.
잇따른 기적
1990년 6월 21일, 그날 인생을 바꾸는 또 다른 일이 있었다. 샤라스 바부는 총장실을 나온 뒤에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에 지원한 적도 없는데 찾아온 기적이었다. 여동생 지바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바나는 그 당시 여자 기숙사에 거주하며 푸네대학교에서 영어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오빠, 내 이야기 좀 들어 봐.” 지바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같이 사는 방원이 있는데 이름은 수마티야.” 지바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수마티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지만 기독교 아동 기금으로 재정 지원을 받고, 사랑이 넘치는 인도 부부인 K. S. D. 찰스와 그의 부인 셀레이나에게 도움을 받아 고등학교 교육을 마칠 수 있었고 지금은 가정학 학위를 취득하려는 중이야.” 그때 샤라스 바부의 삶을 영원히 변화시킬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수마티가 오빠를 지켜보고 있었고, 오빠를 좋아한대. 우리 엄마와 아빠가 승낙하시면 오빠와 결혼하고 싶대.”
1991년 6월 21일, 정확히 1년 뒤 샤라스 바부와 수마티 키스쿠는 고향인 스리랑가파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앞두고 열흘 동안 폭우가 쏟아져 마을과 주변이 거대한 진흙탕이 되었다. 결혼 날짜를 바꾸거나 다른 장소를 구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길이 임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결혼식 전날 비가 그쳤고, 강한 햇볕이 내리쬐어 비록 진흙 길이지만 보도로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식에 처음 도착한 손님들은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헤치고 우산을 쓰고 도착했다. 그 와중에도 주변 마을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스리랑가파트남만 몇 킬로 반경에서 유일하게 마른 땅이었다.
부부는 스파이서대학교 캠퍼스에 신혼살림을 꾸렸다. 샤라스 바부는 교수직을 다시 시작했고 수마티는 학적팀에서 근무하다가 나중에 엘렌 화잇 센터로 옮겼다. 시간이 지나 소중한 딸 셀레이나가 태어나며 이제 가족은 세 식구가 되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2007년, 샤라스 바부는 아내의 지지와 격려를 받아 국제 사역을 시작했다. 그 첫걸음은 런던에서 개최된 21일간의 전도 집회였고 이 집회로 9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 전도회는 이후 영국 전역을 방문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곧이어 먼 곳에서 초청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잠비아의 몬제, 인도네시아의 마나도, 케냐의 키시 그리고 미국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 등지에서 요청이 쇄도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일시 중단되었지만 이후 초청은 다시 늘었다. 이제 64세인 샤라스 바부는 하던 일을 늦추려 하지 않는다. 매년 크리스마스와 여름 방학에 학생들을 데리고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이는 학부 시절부터 계속해 온 일이다. 또 지난 10년간 매주 월요일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방송되는 <굿 뉴스 TV 채널>에 출연해 왔다. 3년 전에는 구원에 이르는 길(비재림교회 TV 채널)에서도 그에게 예언과 말세에 관한 일일 강연을 부탁했다. 현재 그는 호프채널인디아에서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제 꿈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어요.” 샤라스 바부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재림교회 대학교 신학과 교수로서 미래의 목회자와 교사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열 살이었을 때 사탄은 제 아버지에게 제가 인도의 길거리에서 또 다른 시각장애인 거지가 될 운명이라고 조롱했죠. 55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완전한 어둠 가운데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시어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 그분의 영광과 은혜의 빛을 비추게 하셨어요. 모든 영광과 찬송을 오직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힘과 긍정적인 인생관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주저 없이 답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약속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희망이 저에게 올바른 인생관을 유지하도록 돕습니다. 고난의 시간은 잠깐이고 온전히 회복되고 충만하게 될 날이 꼭 올 겁니다.”
그는 기쁨과 기대 속에서 다시 보게 될 그날을 고대한다. 고향 마을의 푸른 논밭이나 산들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야자수가 있는 먼 산 풍경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오랜 세월 변함없이 친구가 되어 주신 사랑하는 구주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사랑하는 아내 수마티를 보고 싶습니다.” 샤라스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2020년에 아내가 뇌동맥 파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29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함께했습니다. 그동안 그녀의 얼굴을 한 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어둡고 가혹한 세상 속에서 그녀는 제 손과 발 특히 눈이 되어 주기 위해 자신의 평범한 삶을 희생했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아내 덕분입니다.” 소중한 딸 셀레이나를 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 “가끔은 딸아이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곤 했습니다. 눈먼 아버지로 인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지만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사랑과 인내, 헌신으로 저를 돌봐 주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샤라스 바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많은 사람처럼 나 자신을 위한 성공(권력, 지위, 명예)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보다 앞에 두려는 유혹에 빠졌겠지요. 그런데 이제 제게 그런 계획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제 유일한 일입니다.”
샤라스 바부의 아버지는 80세까지 살면서 아들이 결혼하여 아버지가 되고, 2000년에 복음 사역자로 안수받은 뒤 2001년에 앤드루스대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 스파이서대학 및 신학대학원의 교수로 임용되고 미국 미시간주 앤드루스대학교 신학과 객원교수로 임명되는 모습을 기쁨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였다.
독자들은 어쩌면 이혼, 불치병, 재정적 어려움, 경력에 대한 실망, 시각 장애와 같은 어둠의 시간을 온몸으로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캄캄한 밤을 마주하고 있는가? 낙심하지 말라. 캄캄한 밤에도 일하시는 하나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시 121:3, 4)이 곁에 계신다. 가장 어두운 밤에도 하늘을 가로지르는 달을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인생의 어두운 밤길을 걷는 여러분을 인도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샤라스 바부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어둠이 결코 이길 수 없음을 확실히 보여 준다.
프라탑 라오 은퇴한 임상 실험실 전문가이며 현재 미국 메릴랜드주 로럴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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