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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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으로서 중환자실을 방문하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은 날이 없다. 죽음을 목전에 둔 분들의 눈망울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우리 중에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현대 의술은 우리 눈에 죽음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 놓았다. 죽게 될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병원이나 호스피스나 요양원 등에서 잠든다. 과거처럼 떠나는 사람을 온 가족이 둘러보며 마지막을 보내던 시절은 이미 끝이 났다. 이제는 여러 모니터 장치에 둘러싸여 삑삑거리는 기계 소음 아래서 마지막을 보낸다.
결혼식의 흥을 가장 신랄하게 깨는 것은 주례하는 이들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란 말처럼 슬프고 두려운 말이 있을까? 그날 행복한 것과 상관없이 결혼의 결말이 비극이란 것을 눈치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명작동화인 신데렐라,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이야기들은 해피엔딩일 때 이야기를 마친다. 그러지 않으면 훗날 주인공들도 늙고 병들어 결국 죽음으로 이별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져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주인공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서둘러 이야기를 마치는 게 아닐까!
로마 제국 황금기에 정복 전쟁에 승리하여 복귀하는 개선장군 행렬 뒤에는 늘 ‘메멘토 모리’를 외치던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실상 우리도 매일 적금 붓듯이 죽어 가는 중이다. 사람은 꿈속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가장 햇빛이 찬란한 날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면서 산다.
우리보다 열 배 가까이 살았다는 성경 창세기의 인물인 므두셀라도 죽었다. 오래 살아도 결국에는 죽는다. 부자도 죽고 가난해도 죽는다. 건강해도 죽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죽는다. 천재도 죽고 바보도 죽는다. 혼자 살아도 죽고 결혼해도 죽는다. 사랑해도 죽고 미워해도 죽는다. 사람은 어떤 모양으로 살아도 죽는다. 죽음은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성취하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든다.
깊은 밤이면 가족과의 이별을 생각하며 삶의 공허로 뒤척인다고 고백하는 친구들이 생각난다. 머지않아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땅에서 나눈 사랑과 추억이 영원히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생각으로 괴로운 그들의 어깨가 수척하다.
공원에서 아이와 공놀이하며 행복해하는 아빠의 뒷모습에 흐르는 외로움을 본다. 손을 꼭 잡고 다정이 걸어가는 연인의 모습에서 외로움이 줄줄 떨어진다. 온 가족이 단란하게 식사하는 분위기에도 외로움이 자욱하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영원하지 않기때문이다. 결국 모두 이별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별로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는 공허의 세계에서 이별의 고통이 없거나 그런 고통을 덜 받는 현명한 길은 무엇일까? 아마도 서로 무관하게 사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받는 고통은 다 사람과의 관계 때문이지 않는가? 직장이 아니면 만날 이유가 없던 사람들이 만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관계를 끊으면 피차 고통을 덜 주고받지 않을까? 그렇게 사랑도 정도 미움도 엮기 힘든 적막한 산야로 들어가면 적어도 관계에서 오는 고통은 약해지지 않을까 싶다.
성철 스님은 자신을 그리워해서 찾아온 어머니를 쫓아 보냈다고 한다. 고매한 스님이 왜 그랬을까? 인생이 유한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마침내 이별한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질 때 마음이 아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고통을 받는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엄청난 불행을 겪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랑은 슬프다. 사랑은 상처를 입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헤어지기 때문이다. 독자들도 사랑하는 부모님과 헤어질 날이 올 것이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헤어질 날이 올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와도 헤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은 기필코 나를 찾아오고야 만다. 그때가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당할 것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고통이 클 것이다. 왜냐하면 더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오래 사랑하며 살고 싶으나 사랑할 시간이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긴 시간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생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랑과 영생은 같은 의미처럼 보인다. 신앙의 근본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교회란 도덕을 넘어 존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곳이다. 서울에서만 매주 수백만 명이 교회로 몰려든다. 교회는 선한 사람이 되려고 찾는 곳을 넘어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 헤어지지 않으려고 찾는 곳이 아닐까?
그래서 구원, 영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영원히 살아도 좋을 조건은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저희 이름이 생명책에 있노라”(빌 4:3),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딤전 5:15)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미 그들의 구원 여부를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바울에게는 어떤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 분명하다.
내가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부모님과 영생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영원히 불편하게 사는 건 고통이다. 사랑이 없으면 오래 함께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자비하신 하나님은 영원토록 함께하는 것이 불행한 이들을 사랑하사 그들에게 고통 없는 영원한 잠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이 좋은 이들에게는 영생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위해 착하게 살려고 몸부림치기 전에 내게 없는 사랑으로 괴로워하며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란 말씀을 의지하여 엎드려 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믿는다.
내가 딱 그 형편이다. 천 명이 넘는 직원이 여전히 내게는 남이다. 수백 명의 환우도 여전히 남이다. 수십 년 목회를 해도 기껏해야 가족밖에 사랑이 되지 않는다. 살면서 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유일한 일은 서로 사랑하는 일이지 않을까?
내게 사랑이 없으면 영생할 이유가 없다. 죄의 중력을 안고 사랑 없는 몸으로 자전하는 내 자신이 평생 숙제다. 속절없다. 누가 사랑 없는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줄까?(롬 7:24) 그분께 나를 던져 기도한다. 나도 우리도 부디 영생해도 좋을 사람으로 빚어 주시기를.
- 윤영한 삼육서울병원 원목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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