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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스크럼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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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사미디어 등록일 202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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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럼블 교차로와 하치공 이야기

도쿄 시부야의 스크럼블 교차로는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어디로 가는 사람들인지 모를 수많은 사람이 신호등이 녹색불로 바뀔 때마다 네 방향에서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장관으로 유명합니다.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가 된 이곳은 도쿄를 방문한 여행자들이 반드시 들러야 할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교차로 위에서 도쿄의 심장 박동을 느끼고, 주변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보며 교차로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은 저 교차로를 건너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분명 유명한 교차로 한번 건너기 위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은 저 교차로를 건너 어디론가 다시 분명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부야 스크럼블 교차로에 선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목적지로 향하며, 저마다의 꿈과 열정을 품고 스크럼블 교차로를 건너는 것이겠지요. 


한편 스크럼블 교차로 한쪽에는 작은 광장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하치공 동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치공은 1920년대에 살았던 충실한 개로 주인이었던 우에노 히데사부로 박사가 퇴근할 때마다 시부야역으로 마중 나갔던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주인이 사망한 뒤에도 하치공은 무려 10여 년 동안 매일같이 역으로 나가 죽은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하치공의 동상은 사실 두 번째로 세워진 것입니다. 충견 하치공은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을 기념하는 ‘하치공 동상’의 제막식(1934년 4월)에 참석하였고, 1935년 3월 8일에 죽은 주인을 기다리며 역 앞에서 생을 다하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충견의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그러나 1934년에 세워졌던 첫 번째 동상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군수품 제조를 위해 패전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에 용해되어 결국 기관차의 부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부야 하치공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마리 충성스러운 개의 일화로만 기억하기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습니다. 1920~30년대 일본은 전통적 가치와 현대화 사이에서 갈등하던 변화와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하치공이 주인을 기다리던 시부야역은 막 철도가 발전하며 근대 도시로 변모하던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오늘날 하치공은 단순히 사랑받는 도시의 상징을 넘어 역사의 소용돌이와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것이 가지는 따뜻한 공감력을 잃지 않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아오야마 공원묘지

도쿄 시부야의 스크럼블 교차로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오야마 묘지에는 하치공의 주인 우에노 히데사부로 박사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하치공의 무덤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오야마 묘지는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에 위치한 도립공원 묘지로 1872년에 조성된 일본 최초의 공영 묘지입니다. 이곳은 도심 속의 평화로운 안식처이자 일본의 근현대사가 깃든 공간으로 묘지 중앙을 가로지르는 일차선 도로를 따라 택시들이 지나가고 양옆에는 벚꽃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계절마다 변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에 담고자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이 공원 묘지에는 210기의 외국인 무덤이 있으며 그중 두 기는 한국인 것입니다. 한 명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개혁파 김옥균, 다른 한 명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생이던 박유굉입니다. 



김옥균과 박유굉 그리고 그렌저

김옥균은 조선 후기의 개혁가로 조선을 근대화하고자 하는 열정적인 꿈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조선 내부의 보수적 반발과 외세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실패로 끝나 버리고 맙니다. 그가 시도했던 갑신정변은 단 3일 천하로 끝났고 그는 조국을 떠나 망명객으로, 도망자로 남은 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암살자를 피해 태평양의 작은 섬, 북해도 그리고 도쿄 변두리에서 숨어 지내던 그는 결국 중국에서 암살당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운반되어 양화진 나루터에서 능지처참당했습니다. 그의 머리는 효수되었고 나머지 시신은 조선 팔도로 보내져 저잣거리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의 시신을 거두어 무덤을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도 불가능해 보였으나 현재 그의 무덤은 충남 아산시 영인면, 일본 도쿄 아오야마 묘지, 일본 야마나시현 진조지(眞淨寺)라는 절 이렇게 세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육신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 그의 무덤이 3곳이나 된다는 것은 그의 삶이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김옥균의 묘비에는 그의 비범한 재능과 비극적인 삶을 함축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 비상한 재주를 가졌으나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없이 비상한 죽음을 맞이하였다”(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김옥균의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박유굉(朴裕宏, 1867~1888년)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하던 중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원으로 참여했으나 정변의 실패 후 동료 유학생들이 처형되고 고향의 부친이 구금되는 등 심리적 압박감과 구한말 조국의 정치적 혼란과 강대국의 대립 속에서 깊은 고뇌 끝에 21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무덤 앞에서는 당시 조선 청년들이 느꼈을 시대적 좌절과 무력함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아오야마 묘지의 한 구석에 사후 100여 년 이상을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박유굉과 김옥균의 묘는 근대 조선을 꿈꾸었던 젊은 청년의 부서진 꿈과 비범한 재능을 펼쳤던 개혁가의 흔적을 보여 줍니다.


김옥균의 무덤 바로 왼쪽 곁에는 윌리엄 그렌저(1844~1899)라는 미국인 선교사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는 일본에 파송된 최초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선교사로 일본 재림교회의 기초를 세운 인물입니다. 1896년에 도일하여 도쿄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던 그는 단 3년간의 사역을 이어 가던 중 병으로 그의 사랑하는 선교지에서 생을 마쳤으며 아오야마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헌신은 일본인 구니야 히데 전도사를 통해 이어졌고, 그 복음은 결국 한반도로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 한반도에 뿌리내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시작은 그의 사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역사의 스크럼블 교차로

도쿄의 아오야마 공원묘지는 단순히 누군가의 삶의 끝을 담은 공간이 아닙니다. 이곳은 다양한 삶의 이야기와 역사의 흐름이 교차하는 스크럼블입니다. 묘비마다 새겨진 이름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배경 속에서도 꿈을 품고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김옥균의 개혁의 꿈, 그렌저 선교사의 복음의 헌신 그리고 박유굉의 고뇌와 좌절은 시대와 배경은 달랐지만 모두 자신의 길을 찾고자 치열하게 살았던 증거들입니다.


이곳에서 잠들어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과거에서 오늘로, 내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지금 무엇을 꿈꾸며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너희의 삶은 후대에 어떤 흔적으로 기억될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오늘 우리의 삶은 언젠가 긍정이든 부정이든 누군가의 길을 밝히는 무언의 역사가 될 것이다.” 



​남형우 ​일본에서 17년째 사역 중인 선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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