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의 interview-e] 프랑스 파리한인교회 박진녕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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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어린 진녕이 살던 골목 입구에는 교회가 있었다. 일요일마다 들려오는 찬양은 너무 아름다웠고 ‘저런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교회가 믿는 신은 정말 아름다울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교회에 가면 왠지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을 것 같고 선물도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갈 수가 없었다. 엄마는 불교 신자였고 한 집안에 두 종교를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 불우한 어린 시절, 힘이 된 하나님
부모님 모두 교육자로 일하셨지만,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갈등이 무척 심했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힘든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도 없었고 엄마가 읽을까 봐 일기장에 뱉어낼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찬양소리로 전해 들은 하나님이라는 분이 그에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부모님이 제일 힘든 문제이니 ‘하나님’이라는 ‘신’을 더 갈망하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그분께 모든 것을 터놓기 시작했다.
뜻밖에 찾아온 행운은 기독교 학교에 진학한 것이었다. 학교에만 가면 정말 행복했다는 그는 “그토록 알고 싶었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배울 수 있었고, 그때만큼은 마음 놓고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었다. 일주일 중 예배 시간만 기다릴 정도였다”며 그 힘으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 뭐든지 그의 잘못인 것만 같아 ‘내가 없어지면 엄마가 행복해지겠구나’ 싶어 두 번이나 삶을 포기하려 했다. 목을 매달았을 때는 지지대가 무너져 앉았고, 약을 한 움쿰 털어 넣었을 때는 엄마가 황급히 응급실에 데려갔다.
■ 뜻하지 않은 길에서 만난 진리 교회
대학교에 가자마자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연세대에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수학을 좋아해서 안전하게 이화여대 수학과에 원서를 냈다. 그런데 시험 당일 고사장에 늦게 도착했고 하필 첫 시험이 수학이었다.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때의 상실감은 너무 컸지만, 덕분에 엄마에게 “이제부터 내 삶은 내가 선택할 거예요”라고 선전포고를 하고 패션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던 중 남편을 만났다. 남편과 함께 프랑스 생활을 막 시작할 때, 1년간 미국 올랜도대학에 교환교수로 오신 아빠를 만나러 갔었다. 그런데 아빠가 “진녕아! 내가 너희 엄마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가 없었는데 여기서 진리 교회를 만났다. 너도 여기서 침례를 받자. 토요일이 안식일이니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갑자기 안식일이 토요일이라고 하니 아빠가 웬 이단에 빠졌구나 싶어 걱정도 됐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싶었다.
교회에서는 “우리는 진실을 말하고 있으니 그것이 맞는지 스스로 잘 알아보라”고 했고, 프랑스로 돌아온 후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며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일요일이 안식일이라는 말은 없었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토요일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 봐도 너무 당연한 사실을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더 이상 일요일교회에는 다닐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지키라는 날을 지키고 싶어서 재림교회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에는 한인재림교회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현지 재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 목사님과 불어로 성경공부를 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신체 언어를 써 가며 몇 개월간 성경공부를 하는데 얼마 후 목사님이 파리 북부 외곽에 있는 교회로 발령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로 오는 목사님과 또 힘들게 소통을 시작하는 것보다 그동안 계속 공부하던 목사님과 공부를 하고 싶었다”며 수 개월간 무시무시한 동네를 장거리로 오가면서 성경공부를 마친 그는 1999년 기쁨으로 침례를 받았다.
그동안 다니던 일요 교회 목사님께 안식일 준수를 위해 재림교회로 옮기게 됐다고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며 편지를 드렸다. 처음에는 ‘그곳은 이단이다’라며 말리시다가 나중에는 교인 모두가 그를 피해야 할 위험한 신자 취급을 했다. 안 그래도 외로운 타국생활인데 진리 교회를 택한 후 더 외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문제는 안식일이 돼도 함께 예배드릴 사람도 없고, 다닐 교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림교회에서 운영하는 교과방송과 설교를 들었고, 국제교회를 다니며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신실한 한국인 여신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어렵게 신앙을 지켜나가면서 그와 알게 된 모든 현지 교인에게 ‘한국 재림교인을 만나면 꼭 연락해 달라’며 연락처를 남겼다.
■ 간절한 마음을 들으신 하나님
어느 날, 국제교회 담임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국에 계신 한국인 목사님이 프랑스에 방문하셨다는 것이다. 목사님을 만나러 안식일에 어느 가정집에 가보니 한국인들이 모여 미국에서 온 목사님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너무 놀라운 장면이었다. 예전에 그가 너무 외로운 나머지 프랑크푸르트 한인재림교회를 갔을 때 전해 들었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홀로 신앙하고 있던 박효식 집사도 있었고, 그에 대한 소식을 듣고 파리에 한인교회를 개척해야겠다고 기도하던 (고)김현수 목사(베를린 한인교회 개척한 목사), 일요 교회에서 진리를 깨닫고 개종한 네 가정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한 명만 보내달라고 했는데 교회를 만들어 주셨네!!’
알고 보니 박효식 집사가 어느 날 공항에서 픽업 서비스를 하는 아내 대신 일을 하러 공항에 갔다가 차에 태운 고객들이 뒷자리에서 ‘안식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알고 보니 재림교회의 기별을 인터넷을 통해 깨우치고 일요 교회에서 한꺼번에 나온 네 가정 중 몇 명이었다. 그렇게 김현수 목사, 박효식 집사와 개혁한 네 가정과 함께 예배를 드렸던 날은 박 집사에게 잊지 못할 감격의 안식일이었다. 어른과 아이, 모두 12명으로 시작한 교회에 지금은 25명이 출석한다.
박진녕 집사는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고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를 모두 들으시는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라고 말하며 “보통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하나님을 알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는데 오히려 불행했던 어린 시절 덕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파리에서 패션디자인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박 집사는 방학을 맞아 한국에 나와 있는 동안 서울본부교회와 서울동부교회 등에서 예배를 드리며 “여기는 교회마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방도 정말 많네요”하며 신기해했다. <말씀향기> 책을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며 서회에 들른 그는 다 들고 갈 수 없을 만큼 책을 많이 샀다. 그리고 네 권짜리 묵직한 성경필사 책을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구입해 그날 저녁부터 필사를 시작했다.
박 집사는 인터뷰를 마치며 “생각해 보니, ‘이제는 한국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설령 지구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해도 하나님 한 분만 계시면 된다’는 믿음이 생겼을 때 그토록 기다리던 신자들을 만나게 하시고 교회를 만들어 주셨다. 모든 사람이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눈과 기자의 눈이 마주쳤을 때, 동시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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