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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야 히데 목사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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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김범태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2004.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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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최초 안수목사 ... 한국에 복음의 씨 파종
91세의 일기로 주 안에 잠들기까지 일본교회 역사의 산증인이자 한국에 세천사의 기별을 전해준 복음의 전령으로 산 쿠니야 히데 목사. 사진기자 자료사진
쿠니야 히데(1872-1962) 목사는 1872년 10월 10일 일본 이바라키켕 츠쿠바 산 동쪽 부근 요카마치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8세까지 농업에 종사하던 그는 동경으로 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후치타 시게요시의 비서로 일했다. 만 20세에 입영하여 근위사단 포병연대에서 3년간 복무한 후 1895년 종전과 함께 제대하고 육군회계 3등병 서기의 사령을 받아 참모본부에서 일하게 된다.

그 무렵 사랑하는 두 여동생을 잃고 죽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쿠니야 목사는1896년 12월 위해위 주둔군 공병대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 중국 내륙선교 침례회 선교사였던 영국인 프라이스 목사에게 기독교 기별을 전해 듣고, 중국인들과 함께 침례를 받았다.

1897년 3월 부대가 동경으로 이동하게 되어 보병 제2연대에 근무하게 된 그는 5월 견습군의관이었던 가와사키 모쿠다로를 야전 연습장에서 만나게 되어 이후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당시 성공회 신자였던 가와사키 군의관은 한 친구의 소개로 재림교 선교사 그레인저(1844-1899, 초대 일본선교사) 목사의 영어 성경연구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쿠니야를 인도하게 되었다.

처음엔 강의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쿠니야는 그러나 그레인저 목사의 고상한 인품에 매료되어 매일 참석하게 되었다. 후에 오코히라 전도사가 통역하게 되었을 때 복음의 빛이 비춰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의 기별을 받아들였다.

현대진리를 받아들인 두 사람은 안식일을 성수하기 위하여 깊은 생각 끝에 군대를 사직하게 된다. 이후 가와사키 군의관은 코니시의원에서 일하게 되었으나, 쿠니야는 한동안 매우 궁핍하게 지내다가 그레인저 목사의 소사가 되었다.

1898년 1월 1일 시바공원에 시바화영 성서학교가 개설되었는데 쿠니야는 여기 입학하여 그레인저 목사와 오코히라 선생에게서 성경과 영어를 배웠다. 일본 최초의 침례식이 1899년 4월 30일 동경시외 메구로가와에서 거행되었는데, 가와사키 군의관과 쿠니야 히데 그 외 두 사람과 함께 4명이 그레인저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그해 6월 동경교회가 조직되었고, 7월부터는 말세복음이 발간되었다.

성경학교도 잘 진행되어 나갔고, 일본 전도도 점차 자리가 잡혀가고 있을 즈음, 뜻밖에 그레인저 목사를 잃게 되었다. 1899년 10월 31일 그레인저 목사가 향년 57세 때의 일이다. 임종하는 은사는 극진히 사랑하는 제자 쿠니야 히데에게 “당신은 동포(일본인)를 사랑합니까?”라고 물었고, 쿠니야 히데는 “예”라고 대답했다. 이는 은사의 유언에 대한 맹세였다.

쿠니야 목사는 그후 용맹과감한 전도 외길의 생애로 일관하였다. 1904년 1월 3일 고베교회를 일본에서 두 번째로 조직하고, 그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을 때에 하와이로 이민 가던 이응현과 손흥조를 만나 재림기별을 전하고, 같은 해 5월 초 침례를 주어 한국 최초의 재림교인이 되게 하였다.

그해 8월에는 전쟁의 와중에도 한국의 마게도냐 부르짖음에 응하여 언어도 통하지 않고, 노자도 없고 더욱이 신병 중이었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노자를 구해 아픈 몸을 이끌고, 고베를 떠나 일주일 만에 한국으로 건너와 임기반, 강창오 등 새로운 구도자들과 협력하여 세천사의 기별을 전했다.

그리고 일본미션장으로 있던 프랭크 휠드 목사에게 이를 보고하여 5주 후에는 휠드 목사도 합류하여 진남포를 중심으로 용강, 강서, 중화 등지에 복음을 전파해 71명에게 침례를 베풀어, 안식일 준수자가 150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선돌(용강군 지운면 입성리), 강대모루(강서군 보림면 남삼리), 용동(용강군 오신면 구룡리), 바매기(중화군 해압면 간곡리) 등 4곳에 교회를 조직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9월 30일까지 50일간의 성공적인 전도여행을 마친 그는 휠드 목사와 함께 귀국하였다.

다음해 12월 다시금 부산과 진남포 등지를 방문하고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1907년 1월 고베에서 일본미션 제1회 총회를 개최하였을 때, 일본에서 최초로 오코히라와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문서전도인과 일선목회자로서 뿐만 아니라 편집인과 선교부장으로도 봉사하였다. 1935년 5월 11일 한국선교 30주년 기념식에 특별 초청되어 참석하고, 옛 선교한 교회들과 교인들을 찾아 격려하고 감개무량해 했다고 한다.

1962년 7월 22일 91세의 일기로 주 안에 잠들기까지 61년간의 긴 사역기간동안 일본교회 역사의 산 증인으로, 또한 한국교회에 세천사의 기별을 전해준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김재신 목사의 '한국 재림교회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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