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성취로 가는 길목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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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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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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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이탈리아 국회 연설의 의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이탈리아 국회를 찾은 점은 재림신도들에게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이번 방문은 단순한 국가 방문이 아닌 ‘예언의 성취’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정거장’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재림교회는 1798년 프랑스혁명 당시 교황 피우스 6세(Pius Ⅵ)가 프랑스 혁명정부의 버르티어(Berthier) 장군에 의해 처형당하게 되는 사건을 교황권의 몰락과 함께 다니엘서 7장 25절과 12장 7절에 나타난 “한 때, 두 때, 반 때”의 역사적 성취로 해석한다. 1798년이 바로 538년에 시작된 중세기 교황권의 전성기가 꼭 1260년 만에 종막을 고하게 되는 역사적 해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곧 계시록 13장 3절의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라는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양측이 상호주권을 인정한다는 1929년 무솔리니와의 ‘라테란 조약’의 체결로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라는 계시록 13장 3절의 예언을 성취시킨다. 교황과 무솔리니는 1926년부터 3년간의 비밀협상 끝에 1929년 2월 11일 29개항의 '라테란조약'과 45개항의 '종교협약'에 서명했다. 같은 해 6월 7일, 이 협약들이 비준됨으로써 이탈리아정부는 교황이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지니고 있으며, 가톨릭교회는 국가의 유일한 종교이고, 바티칸시국은 주권을 행사하는 독립국가임을 인정하는 서약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로마 문제’가 이처럼 형식적, 공식적으로는 해결되었지만 여전히 이들 국가간 앙금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어 왔다. 이제껏 그 어느 교황도 이탈리아의 입법부에 선 사람이 없었던 데에서 그 ‘껄끄러운’ 관계가 입증된다.
그동안 전임 교황들이 이탈리아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 데는 이유가 있다. 1870년 이탈리아를 통일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Emanuele∥) 왕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한 뒤 교황 피우스(Pius) 9세로부터 모든 세속적인 지배권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교황 피우스 9세는 통일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포로’라고 불렀다. 이같은 배경으로 그 어떤 교황도 세속적인 이탈리아의 입법기관(국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되었다.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의 갈등은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면서 해결됐지만 불편함은 남아 있어왔다.
이러한 면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최초로 이탈리아 국회에 서서 연설한 점은 교황권이 세계적으로 계속해서 그 머리를 들고 있으며, 교황권이 자신들의 머리를 더욱 치켜세우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교황의 이번 이탈리아 국회 방문을 두고 “교황청과 세속국가 이탈리아의 해묵은 갈등을 치유하는 거보(biggest step)”라고 평가하고 나선 세계의 환영어린 평가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세계는 지금, 예언의 성취를 향한 발걸음을 뚜렷히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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