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맞은 장현교회 명대숙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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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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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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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명학교 출신 최초 여전도부인으로 활동
오직 복음전파만이 자신의 소명이자 영원한 사명으로 알고 살아왔다는 명대숙 할머니(장현교회). 아직도 건강한 모습의 그녀는 100수를 맞은 소감을 “늙은이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다”는 교회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대신했다.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에서 명국승 씨와 김여대 여사의 4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난 명 할머니는 1917년 전시열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은 이후 오직 예수만 바라며 복음전파를 위해 기도하고, 땀흘려온 일평생을 살아왔다.
명 할머니가 재림교인이 된 것은 그녀가 12살 되던 해. 감리교 신자였던 부모님이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일요일이 안식일이 아님을 깨닫고 이웃의 네 가정과 함께 재림교인이 되면서였다. 그것은 강릉교회의 시작이기도 했다. 감리교 신앙을 지도하던 초등학교의 설립자였던 아버지는 이후 강릉교회의 초대 장로로 봉사했다.
19살의 나이로 순안의명학교에 입학한 명 할머니는 아직도 우리 귀에 쟁쟁한 오영섭 목사, 우필원 목사, 이여식 목사의 사모인 고계옥 여사 등 한국 재림교회 초기 역사의 주인공들과 함께 공부했다. 할머니는 “당시의 학생들은 신앙이 무척 좋았다”며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특히 기숙사 사감선생님은 채 열명도 되지 않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을 무척 사랑해 주어 지금도 고맙다며 아름답던 당시를 회상했다. 어느새 젊은날을 추억하는 노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러나 명 할머니는 동생이 의명학교로 진학하면서 학교를 채 마치지 못한 채 가정형편상 3학년으로 중퇴해야 했다. 이후 그녀는 자급 전도사역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민태오 장로와 함께였다. 이것이 한국 재림교회 최초의 여전도부인 활동이었다.
특히 1946년부터 27년간은 쉬지 않고 봉사한 전도활동의 전성기였다. 4년간의 원주 문막의 활동을 시작으로 6.25 사변의 와중에서도 교회가 없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자급사역 활동을 전개했다.
전쟁이 끝나자 경기도 용인으로 달려가 2년간 봉사하며 낙심자를 찾아 나섰다. 충남 대천교회에서는 만 8년간 사역하며 광천, 남곡리 등 주변교회들까지 보살폈다. 이후 청진동교회에서도 2년간 봉사했다. 자신의 생업과 함께 교회일을 돌봐야 하는 바쁜 삶의 연속이었다.
이후 오영섭 목사의 부탁으로 충북 괴산과 충남 입장, 인천 등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전파로 한국 선교역사와 숨을 같이했다.
명 할머니는 “고생은 됐어도 교회가 자라니까 그저 감사하고 기뻤다”며 회고했다. 또 “주의 사업을 한다는 마음에 몸이 비록 고되더라도 마음은 기쁘고 보람찼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회에 함께 다니던 사람들의 소식이 끊어지고, 어느덧 신앙을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것처럼 마음 아픈 일도 없었다고.
지금도 언뜻 보기에는 100세를 향유한 노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명 할머니는 매일 아침 규칙적인 운동과 절제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할머니는 특히 작년까지만 해도 집 앞 텃밭에서 소일거리로 배추나 무우 등 채소를 가꾸기도 했다.
항상 아침, 저녁 기도시간이면 어김없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무릎 꿇는 할머니는 요즘들어 중국과 북한 선교사업의 발전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단 하나의 소망은 예수재림의 소망이었어. 하지만 이제는 부활의 소망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거야. 중국과 북한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기분이 좋아. 하루속히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길 기도해...” 지금도 인생의 산을 정복해 가고 있는 명 할머니의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다.(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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