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보는 호남선교 110년 역사 발자취
페이지 정보
본문
[1914-1918] 호남에 최초의 교회를 세우다
호남 지역의 재림기별은 1911년 말 김병룡 씨와 리정식 씨가 군산에서 문서전도를 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하루에 월보 80원가량을 팔면서 세 천사의 기별을 전파했다. 호남에 첫 목회자가 파송된 1914년에는 15명의 문서전도인이 활동할 만큼 활발했다.
1914년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조선대회 연회(지금의 한국연합회 연례행정위원회)는 남부지방 선교를 위해 이근억 목사와 김석영 전도사를 파견하기로 의결했다. 때를 같이해 개통한 호남선 철도는 선교에 활력을 더했다.
이근억 목사는 전라북도 김제군 월량리를 근거지로 재림기별을 전파했으며, 1916년 1월에는 예배당을 건축했다. 김석영 전도사는 전라남도 나주와 송정리에서 복음을 전했다. 1916년 초에는 신촌리에 사는 지대중 씨를 비롯한 여러 신자를 얻고 전라남도 최초의 집회소를 열기도 했다. 1916년 3기말 보고서에 의하면, 김제와 송정리의 안식일학교생은 각각 16명이었다.
그해 초에는 익산군 오산리, 이듬해 봄에는 순천의 금곡리와 화순군 동면 수촌리, 가을에는 해남군 화원면 매월리에 안식일학교를 조직했다. 1918년에는 보성군 노동면 신천리와 주봉리에 복음이 들어갔다. 1918년 4기말 보고서에 따르면 호남지역 안식일학교 출석생 수는 109명이었다.
[1919~1933] 세 천사여, 날개를 펼쳐라!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그달, 조선대회는 조선합회로 승격됐다. 산하에 서선, 중선, 남선대회를 조직하고 간도를 직할 선교지로 편성했다. 호남은 남선대회에 속했다.
1920년에는 대총회 지원금이 절반으로 줄면서 목회자 수급과 선교 사역에 위기가 닥쳤다. 그러나 천막전도회 같은 역동적인 활동으로 선교는 계속 발전했다. 실제로 1920년 9월 정문극 목사는 나주에서 천막전도회를 개최해 큰 결실을 얻었다.
일제의 더욱 가혹해지는 통치 속에서도 평신도지도자들의 재림신앙과 눈물어린 헌신은 교회를 급속도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었다. 파송된 목회자와 힘을 모은 평신도지도자들은 여러 지역의 교회를 개척했고, 지속적인 문서전도와 의식 있는 지도자들의 삼육학교 설립을 통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34~1938] 호남대회의 탄생
1919년부터 1934년까지 영남대회와 호남대회가 통합된 남선대회가 호남지방 선교를 담당했다. 그러던 중 1934년 5월 30일 열린 조선합회 평의원 회의(지금의 한국연합회 행정위원회)는 남선대회를 영남대회와 호남대회로 나누기로 했다. 호남대회의 선교지역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북도 일부 지역으로 하며, 초대 대회장은 김예준 목사를 임명했다.
최초의 독립된 호남대회 본부는 당시 대회의 안식일학교생 884명의 약 15%인 131명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정읍교회로 정했다. 이는 대전에서 목포까지 이어지는 호남선의 중간지역이라는 지리적인 여건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1939년 제11회 조선합회 총회에서 호남대회와 영남대회가 남선대회로 통합되기까지 호남의 선교본부로서 역할을 다했다.
[1939~1951] 암흑 중에도 불은 타오른다
1939년 총회에서 호남대회와 영남대회는 남선대회로 통합됐다. 대회장은 김항모 목사가 부름받았다. 선교본부는 대전에 세웠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거세지자 1940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철수했다. 이듬해에는 <교회지남>과 <시조>가 폐간됐고, <각 시대의 대쟁투> 등 교회 서적의 판매가 금지됐다. 찬미가의 일부는 삭제됐으며, 성경은 ‘사복음서’만 인정됐다. 급기야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1943년에는 교회가 해산됐다. 이 당시 집회를 지속했던 군산교회의 김덕신 전도사와 박경호 그리고 정읍의 유성렬 씨 등이 투옥됐다.
해방 후 1946년 조선합회는 북선대회와 남선대회로 분리됐다. 호남지역은 남선대회에 속했다. 1947년에는 남선대회를 중선대회와 남선대회로 분리했다. 하지만 교회들이 속속 재건되고 선교 열정이 불타오르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시련이 시작됐다. 이 시기에 순교한 교인도 있었고 가족과 재산을 잃은 교인도 많았다. 전란 중에도 남선대회의 교회는 1950년 7개에서 1951년 14개로 증가했다. 북선대회는 15개에서 1개로 감소했다. 이는 북선대회에 속했던 교인들이 남한의 여러 피난 지역에 정착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굳건히 신앙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런 믿음은 전쟁 후 선교 부흥에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1952~1965] 시련을 딛고 선교 중흥기를 열다
1952년 한국연합회 제16회 총회는 남선대회를 다시 호남대회와 영남대회로 분리했다. 안식일학교생 수는 1952년 1641명에서 1965년 1만8037명으로 크게 성장했다. 평균출석생 수도 1299명에서 1만1457명으로 증가했다. 1953년과 1954년에 호남대회는 5개의 삼육국민학교와 2개의 삼육중학교를 세웠다. 지역교회들은 공중전도회를 비롯한 여러 활동을 통해 부흥의 전기를 마련했다. 광주시 사동 그리스도교회가 재림교회로 개혁하는 일도 있었다.
1950년대는 성경통신학교의 중흥기였다. 2500여 명이 입학해 350여 명이 졸업했다. 또한 한미구호협정에 의해 10대 구호단체로 선정된 아드라가 1957년부터 1965년까지 호남대회 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했다. 1959년부터는 선교선을 이용해 도서 지역 교회와 신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1963년부터 1965년은 호남대회 출석교인이 1만 명을 넘을 정도로 절정기를 맞았다. 정부조직법에 의해 1963년 1월 1일부로 전라북도 금산군이 충청남도로 이관됐고, 재림교회도 충청도에 중서대회를 설립함으로써 충청남도에 있던 호남대회 소속 교회들이 중서대회로 이관된 것도 이즈음이다.
[1966-1982] 교회 부흥으로 자양의 토대를 마련하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는 구호양곡 분배 중단의 후폭풍과 시한부 종말론 문제를 수습하는 기간이었다. 1968년 한국연합회는 조직을 재편했다. 호남대회는 중서대회와 통합해 서남대회가 됐다. 1971년 다시 분리된 호남대회는 1983년 자양 합회로 승격했다. 1971년부터는 5년 단위로 목표를 정하고 적극적인 선교정책을 펼쳤다.
여러 지역에 교회를 개척한 결과, 집회소가 91개소에서 113개소로, 20여 명의 목회자가 30명으로 늘었다. 침례자도 167명에서 551명으로 크게 성장했다.
[1983-2008] 호남 복음화의 전성기를 맞다
1983년 호남합회가 출범하면서 광주연합 대전도회를 실시해 선교를 한층 강화했다. 1985년에는 전도지 187만 장을 전했으며, 합회 설립 이후 가장 많은 859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1984년 광주위생의원을 개원했다. 1985년에는 평신도실업인협회를 조직했으며, 1986년에는 미스바연수원의 부지를 매입했다. 1989년에는 북방선교를 시작했다.
또한 ‘총력전도 95운동’을 전개해 21곳의 교회를 개척했다. 전국 최초로 두암종합사회복지관을 운영해 복지선교의 장을 열었고, 1994년에는 삼육식품 제2공장을 완주군 운주면에 설립했다. 1996년에는 여수요양병원을 유치했다. 1998년의 IMF 외환위기 사태를 이겨낸 후 2000년 마크 핀리 목사 초청 위성전도회를 개최해 300명 가까운 영혼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2009-현재] 진리의 불을 높이 돋우어라!
2009년 임시총회를 개최해 제주도 분리를 결의했다. 2011년에는 선교센터를 건축해 전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12년에는 지역교회 중심 선교를 위해 호남을 7개 권역으로 나누고, 지역선교협회를 발족하는 행정조직개편을 단행했다. 11개의 지역아동센터와 리틀여호수아양성학교를 운영해 미래세대를 육성했으며, 2013년에는 한국 최초로 평신도목사를 임명해 평신도운동을 회복하는데 집중했다.
2014년에는 역사적인 ‘호남선교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때를 같이해 7대 비전을 선포하고 부흥과 발전의 재도약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으며, 2015년에는 기념교회인 송정교회를 준공하고 그 안에 기념관을 조성했다. 광주꿈의교회, 인월지리산교회, 반딧불교회, 나주하늘빛교회를 개척하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2019년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은 선교 지형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디지털 선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체감하고 이에 대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으며, 2022년에는 디지털선교센터를 오픈함으로써 온라인으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2024년에는 선교 110주년을 맞아 재림성도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영적 유산을 보존해 후세대에게 교훈으로 삼기 위해 합회에 선교역사관을 건립했다.
-
인공지능 시대, ‘목회자’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2024.10.24
-
인공지능 시대, ‘재림성도’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2024.10.24
-
[현장 인터뷰]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 결코 못 잊어” 2024.11.14
-
[현장 인터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한 ‘돕는 손길’ 202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