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이 모든 일이 기도 덕분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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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한 달 살기’. 젊은 층에서 뜨거웠던 트렌드다. 지금은 그 열기가 다소 누그러졌지만, 한때는 너도나도 제주도로 몰려들었다. 도시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제주에서 여유를 갖고 사는(쉬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한 달일까. 아마도 직장인이 연차와 월차와 휴가 등 쉴 수 있는 기간을 최대로 끌어모은 기간이 그 기간 정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비용면에서도 한 달이 넘어가면 부담이 커지기 마련이다. 힐링의 의미가 한 달이 넘어서면 퇴색되는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마승용 목사와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제주도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제주도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했다. 한 부류는 한 달 살기 또는 휴가로 머무는 사람. 다른 한 부류는 제주도가 생활터전인 사람이다. 그렇기에 제주도를 생활터전으로 삼는 이들은 휴가 온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리면 곤란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지난 2주일의 시간 동안 기자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었을까. 아마 그 중간 어디 쯤에 위치하지 않았을까 싶다. 제주도가 생활터전은 아니지만 일을 하러 온 사람인 까닭이다. 체류 기간도 딱 그 중간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제주도 2주 살기’ 정도 될 것이다.
베이스캠프인 성산교회 문을 나설 때면 성산일출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마다 이곳이 제주도임을 실감했다. 그러나 조금만 걸어서 읍내로 접어들면 일출봉은 건물에 가려지고 이내 여느 지방 소도시와 비슷한 인상으로 변했다. 취재를 위해 주로 찾았던 오조리 마을은 제주에서도 옛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은 곳이다. 집집마다 담장은 특유의 현무암으로 쌓아 올렸고, 바닷가로 난 길에서는 둘레길을 걷는 여행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부복수 집사의 자택이 딱 그랬다. 대문을 열고 나오면 정자와 바다가 한 폭에 들어왔다.
마을 곳곳에는 오래된 가정집이 리모델링을 거쳐 카페로 옷을 갈아입고 손님을 맞이했다. 취재를 준비하며 제주도 카페가 줄줄이 폐업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래도 잠시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음에 감사했다. 결국 지난 2주의 시간 동안 제주는 기자에게 일터였다.
출장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육지로 돌아갈 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마승용 목사가 최강수 집사와 함께 식사를 하자고 기자에게 말했다. 최 집사는 몇 년 전 제주에 왔다가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아예 눌러앉았다”. 평균연령이 한참이나 높아진 성산교회에서 비교적 젊음을 담당하고 있는 그였다. 칼국수로 점심을 하고 최근 블루오션으로 떠오른다는 카페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마 목사의 사택에서 생활하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어느 정도 달렸을까. 야자수와 어우러진 회색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발음하기 쉽지 않은 스페인어로 ‘해변’이란 뜻을 가진 곳이었다. 이국적인 이름과는 달리 건물의 외관이 눈에 익었다.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냉동창고를 개조한 탓이다. 평일 오후였지만 여행자로 보이는 이들이 창문을 캔버스로, 야자수와 바다를 한 폭에 담아 이국적인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큰 캔버스 앞에 자리를 잡았다. 최 집사는 이미 지난해 9월 제주대회 창립총회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만나자마자 스스럼없이 깊은 대화로 직행할 수 있었다. 최 집사는 냉동창고를 개조한 카페를 둘러보며 피난교회가 문화재가 될 수 있을지 넌지시 물었다. 피난교회는 이미 문화재라고 기자는 생각했다. 단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제주도에 문화재로 등록되는 절차가 남았을 뿐이다. 그동안의 취재 과정에 섞어 기자 나름의 의견을 간략하게 정리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자 최 집사가 무릎을 탁! 치며 맞장구를 쳤다.
“이야~ 맞지요. 피난교회도 여기처럼 단장만 새롭게 하면 진짜 멋있을 거예요”
마 목사는 종종 기자에게 말했다. “만약 피난교회가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해도 실망하지 마세요. 진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이 남아있다는 것이잖아요” 얼핏 피난교회가 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다. 하지만 기자의 취재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도운 그였다.
사택의 방 한 칸을 기꺼이 내어주고, 성산 반대편 서귀포까지 가야 하는 기자를 위해 몇 번이나 자동차로 바래다 줬다. 그랬던 마 목사가 기자를 데리고 냉동창고를 개조한 카페를 찾았다. 피난교회를 되찾으면 이렇게 꾸미고 저렇게 활용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최 집사였지만, 묵묵히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마 목사에게 계속 시선이 갔다.
기자에게 국수를 절반이나 덜어주며 “피난교회를 꼭 되찾게 도와달라”고 말하던 부복수 집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자와 함께 고성리 마을 주민의 집에 찾아가 피난교회 이야기를 들려달라던 한공숙 장로가 생각났다. 우연히 길을 가다 ‘위생병원’이라 쓰인 간판을 보고 그 자리에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던 현춘홍 어르신의 눈물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한 장로는 기자가 성산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마다 손을 잡고 취재가 어떻게 됐는지 묻고는 했다.
그래서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자꾸 길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암, 그래야지”하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기자에게 참한 여청년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제주 출신 여청년과 결혼하면 제주의 일에, 아니 피난교회를 찾는 일에 더 열심을 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기자는 껄껄 웃기는 했지만 속으로 늘 이렇게 대답했다. “장로님, 염려 마세요. 피난교회는 이미 제 일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습니다”
성산교회에서 안식일학교 특순을 썼던 일이 생각났다. 기자가 특창도 하고, 피난교회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성산에 왔다고 설명했다. 성도들을 위한 중간보고 성격이었다. 안식일학교가 마치자 성도들은 기자의 손을 잡고 “꼭 부탁한다”며 연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히려 잘 부탁한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기자인데 말이다. 피난교회를 되찾는 일은 당시를 살아오고 기억하는 어르신뿐 아니라, 성산 모든 성도의 염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육지로 돌아갈 날이 다가와서일까. 지난 취재과정이 창 너머 하늘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기자가 서귀포시청에서, 세계유산본부에서, 또 성산의 거리에서 필요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길을 알려줬던 모든 사람을 만났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기자의 취재과정을 위해 기도했던 성도들 덕분이었음을.
* 이 기사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의 지원으로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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