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문학은 이교(異敎)의 샘에서 솟아나는 독(毒)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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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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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10.23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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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문인협회 회장 남대극 교수
I. “부패한 이교(異敎)의 우물”?
한국 재림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문학”은 과연 무엇인가? 그들의 문학 개념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거나 종래의 그들의 문학관(文學觀)을 지배해 온 말씀은 아마도 엘렌 G. 화잇(Ellen G. White, 1827-1915) 여사가 기록한 다음의 문단일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감수성이 가장 풍부한 청소년의 시기에 젊은이들의 마음은 어떠한 책들에 이끌리고 있는가?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 일에 있어서 청소년들은 과연 어떤 물샘에서 물을 마시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는가?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교사상(異敎思想)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부패한 고대 이교에 근원을 둔 물샘에서 물을 마시도록 가르쳐지고 있다. 젊은이들은 도덕적인 원칙에 대하여는 자신이 전혀 관심이 없다고 표명한 저자들에 의하여 저술된 책들에 대하여 연구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다.
많은 현대의 작가들 역시 이와 같은 비판을 받아 마땅한 형편에 있다. 얼마나 많은 아름답고 우아한 말들이 독자들에게 혐오감(嫌惡感)을 일으킬 추악한 정체를 감추고 악한 원칙들을 아름답게 가장하는가?
그 밖에 많은 소설 작가들은 안락한 궁전에서 향락의 꿈을 가지도록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런 작가들은 부도덕하다고 비난받지 아니할는지는 모르나, 저희들의 저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일은 실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생의 엄숙한 문제들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빼앗고 자기 수련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 226-227).
이 영감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제기되는 질문은 모든 문학은 “이교사상의 우물”이며, “부패한 고대 이교에 근원을 둔 물샘”인가? 그렇지 않는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가? 재림교인이 추구하거나 향유할 수 있는 문학은 전혀 없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하고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화잇 여사의 글들을 중심으로 한번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II. “문학”—재림교인의 금기(禁忌)와 필요(必要)
문학(文學)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 과거에 우리 재림교회 교인들의 문학에 대한 태도는 지나치게 편협한 데가 있었다. 상당수의 재림신도들은 “문학은 곧 이단(異端) 또는 우범(虞犯)”이라는 병적인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아직도 완전히 불식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예언의 신」의 권면을 비교적 철저히 따르고자 애쓰는 재림신도들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좋지 않은 문학이 줄 수 있는 해독(害毒)으로부터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문학을 학습하고 필요한 문학적 자질을 함양하는 일을 방해하는 역기능도 하고 있다.
하지만 「예언의 신」의 말씀에는 청년들이 문학적 소양과 문예의 자질을 가꿔야 한다는 권면을 퍽 자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언의 신」의 서적들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문학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부터 고치는 일이 필요하다.
문학에 대한 지난날의 우리의 태도는 방대한 문필 활동을 통하여 영감의 기록들을 남긴 화잇 여사가 가졌던 태도와는 매우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잇 여사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조화 있게 계발될 수 있기 위하여 영적인 훈련과 마찬가지로 문학적(文學的)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문학적인 훈련 없이는 사람이 각종 신뢰받을 수 있는 위치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교육의 기본, 255-226).
“예술(藝術)과 문학(文學)과 상업(商業)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일이 좌절되어서는 안 되며… …” (교사와 학생과 부모에게 보내는 권면, 19).
“참된 교육은 과학적 지식이나 문학적(文學的) 재예(才藝)를 경시하지 않는다.” (교육, 225).
화잇 여사가 이와 같이 말한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그가 갖고 있던 “문학”이라는 말의 개념이 매우 순수하고 기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의 생각 속에 있던 “문학”(literature)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문자나 서적을 이해하고 취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정의(定義)는 우리말의 사전적 의미와 매우 흡사한 것이다. 이희승(李熙昇) 편, 민중서관 간행의 『국어대사전』에는 “문학”의 일차적인 의미를 “글에 대한 학문⋅학예(學藝)”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학에 관한 개념은 필요 이상으로 편협하며 고식적인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물론 문학에는 각기 다른 영역과 부문들이 있어서, 그 내용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고, 또한 아직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이른바 문학기피증(文學忌避症)이 오히려 안전할 정도로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위협과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허다하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아무리 취급하기가 곤란하고 또 잘못 다룰 때에 위험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을 무작정 외면하기만 한다면 창조적인 두뇌 활동과 이성적인 사고력 형성에 큰 손해를 초래할 것이다.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 권면하는 것처럼, 문학에 관한 수련을 잘 쌓아서 하나님의 사업에 중요한 일익(一翼)을 담당하는 것이 적극적인 재림교인의 태도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건전하게 이해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개념에 입각하여 화잇 여사가 우리에게 준 문학에 대한 많은 교훈들을 살펴보고, 나아가서 우리에게 절실하고 합당한 권면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요긴한 일이다.
III. 애굽의 재앙 같은 문학
앞에서 인용한 몇 구절에서 화잇 여사는 문학의 중요성을 꽤 강조하였다. 그는 수십 권에 달하는 저서들 가운데 적어도 100회 이상 문학에 관한 권면을 기록했다. 그런데 그의 언급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훌륭한 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권면보다는 오히려 유해하거나 불건전한 문학에 대한 경계(警戒)와 금령(禁令)이 훨씬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세상에는 보급되기보다는 차라리 소각(燒却)되어야 할 책들이 범람하고 있다.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출판되고 보급되는 선정적(煽情的)인 화제들을 실은 책들은 청년들이 결코 읽지 않는 것이 좋다. 그와 같은 책들 속에는 사단의 매혹이 있다.” (교사와 학생과 부모에게 보내는 권면, 133).
“또 다른 부류의 문학이 있는데, 이것은 문둥병보다도 더 부정하며 애굽의 재앙들보다도 더 치명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문학에 대하여 우리의 출판사들은 끊임없이 경계할 필요가 있다.” (교회증언, 7:166).
“거짓되고 오염된 문학을 우리의 교육기관으로부터 멀리함으로써 그 사상들이 죄의 씨앗들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 교육의 기본, 388).
“[세속적인 서적에] 탐닉함으로 말미암아 선정적 또는 비도덕적인 문학을 읽는 것이, 마치 아편이나 기타 해로운 약들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습관이 되며, 그 결과 수천 명의 사람들의 마음이 약화되고, 타락되며, 또 심지어는 발광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저술가와 편집자에게 보내는 권면, 134).
화잇 여사가 이상과 같은 말씀들을 기록한 이유는 문학이 갖고 있는 지대한 영향력과 그것의 지속성을 고려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비근한 예를 들어 말한다면, 독서는 식사(食事)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음식물을 앞에 놓고, 그것으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할 아무런 의사 없이 순전히 먹어보기 위한 목적으로, 즉 “시식(試食)”을 위하여 그것을 먹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단 우리의 입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저작(咀嚼)되고 소화(消化)되어 우리의 체력을 돕고 우리 자신의 일부를 형성하게 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식사가 우리의 신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독서는 우리의 정신 또는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에, 아무리 건성으로 또는 시험 삼아 읽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망막(網膜)에 비친 활자들이 의미로 전환되어 일단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심성에 선이든지 악이든지 영향을 끼치고야 마는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책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읽은 후의 나 자신은 읽기 전의 나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인간 역사의 종말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재림교인들이 영적 순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분명해진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통하여 그토록 상세하고도 면밀한 충고와 기별을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셨다. 특히, 현대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책들이 발산하는 크고 작은 악감화(惡感化)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호받기 위해서는 「예언의 신」의 말씀에 나타난 교훈들이 더할 나위 없이 그리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IV. 절실히 요청되는 문학적 자질
그러면 우리는 문학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일체의 비종교적인 서적들과 세속적인 작품들을 완전히 멀리하고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예언의 신」의 대답은 분명히 “그렇다”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는 문학에는 비록 종교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역사, 철학, 문화, 예술, 교양 등의 인문학(人文學) 또는 예능(藝能)과 관련된 것들이 매우 많이 있고, 그것들은 우리가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는 일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잇 여사의 권면들을 보다 포괄적으로 고려하면서 비록 세속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저속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문란한 내용을 담지 아니한 문학작품들은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욱이 그리스도인 생활에 선한 감화를 끼치거나 문학적인 기예(技藝)를 연마하는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작품들은 오히려 읽기를 권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신중과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한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90퍼센트가 다 좋다 하더라도 나머지 10퍼센트에 담긴 불량성이 독자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행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성에 관하여 화잇 여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구별된 지위에 오를 수도 있고, 문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도 있고, 그리하여 오만한 우월감으로써 하늘에서 기원된 진리를 거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 194).
그러나 또 한편으로 화잇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의 사업은 최고의 인격적 역량을 요구하고 있으며, 문학적인 자질(literary qualifications)을 갖춘 젊은 남녀들이 여러 분야에서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22).
“장차 문학적인 자질(literary qualifications)을 갖춘 남녀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필요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교육의 기본, 192).
오늘날만큼 문학의 힘이 복음사업에 절실히 요구되던 때는 일찍이 없었으며, 따라서 문학적인 자질을 구비한 역군들이 현재만큼 요긴한 때는 전에 없었다.
오경(五經)의 율법뿐만 아니라 시편 제90편의 그 주옥 같은 시(詩)와 욥기의 원숙한 인생철학을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는 문필가(文筆家) 모세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하나님의 사자로 활동했고, 입만 열면 영감적인 시구(詩句)들이 거침없이 흘러나오던 시인(詩人) 다윗이 우주의 왕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인간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오늘날의 재림성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은 체력과 정신력뿐만 아니라 “문학적 역량”(literary attainment)에 있어서도 고대 바벨론 제국의 학자들보다 뛰어났다(선지자와 왕, 485). 신약 시대에 활동했던 바울은 이교 헬라의 예술과 종교는 물론 심지어 “그들의 문학”(their literature)에 대하여도 매우 친숙했다(사도행적, 237).
이러한 사실은 21세기와 같은 문명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역군들은 더욱 더 넓고 깊은 학식은 물론 문학을 포함한 각종 예술적 재능에 있어서도 탁월한 수준에 달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화잇 여사는 기록하기를 재림교회 청소년들은 “생리학적인 교육과 더불어 문학적인 지식”(physiological education as well as literary knowledge)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으며(절제생활, 183), 특히,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신체적인 건강 및 인격(人格)의 고매함과 함께 높은 문학적 자질들(high literary qualifications)”(교육, 278)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V. 문학 중의 문학, 성경
성경은 인간이 물려받은 최고⋅최선의 문학이다. 성경은 역사이기도 하고, 율법이기도 하며, 계시이기도 하고, 예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문학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아담이 한 말 가운데서 성경에 기록된 첫 마디는 그가 그의 아내 하와를 보고 읊은 시(詩)이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창 2:23).
이것은 한 편의 연애시(戀愛詩)요 뛰어난 문학이다. 이와 같은 아담의 시를 위시하여 성경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와 노래가 수록되어 있고,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라멕의 시(창 4:23-24), 노아의 시(9:25-27), 여호와의 시(25:23), 야곱의 시(27:27-28; 49:2-27), 이삭의 시(27:39-40), 모세의 노래(출 15:1-18; 신 32:1-43; 33:2-29), 미리암의 노래(출 15:21), 발람의 노래(민 23:7-10 등),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삿 5:2-31), 삼손의 시(15:16), 한나의 기도(삼상 2:1-10), 다윗의 활 노래(삼하 1:19-27), 시편의 시들과 아가(雅歌)의 사랑노래와 예레미야애가의 비가(悲歌) 등은 모두 탁월한 문학작품들이다.
성경의 책들 중에서도 룻기, 에스더, 욥기 등은 매우 아름답게 기록된 전기(傳記) 문학이다. 이른바 “문학서”라고 일컫는 다섯 권의 책들(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은 동서고금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한 고전문학 작품들이다. 성경 기자들은 이러한 문학작품들을 통하여 창조자와 구원자인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구속의 경륜을 노래하였으며, 참된 삶의 도리와 가치 있는 인생길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문학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역할과 최선의 방법을 예시해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재림교인들이 어떠한 문학활동을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문인으로서 할 수 있는 문학의 내용과 범위도 거의 무한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은 시만 쓴 것이 아니라 수상과 수필도 썼고, 명상과 인생철학도 썼으며, 전기와 스토리도 많이 썼다. 연가(戀歌)도 썼고, 애가(哀歌)도 썼으며, 역사소설도 썼고, 법문과 연설문과 기도문도 많이 썼다. 다시 말해서, 문학의 거의 모든 장르를 성경 기자들은 이용하였고, 그것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유익이 되고 구원을 받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작품들을 남겼다.
물론 성경 기자들에게 성령의 지도와 영감이 함께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무런 기본 소양이 없는 사람을 불러다가 그냥 받아쓰기를 시킨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기초적 자질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 시대의 성경 기자들이 한 것은 그 이후의 그리스도인들도 할 수 있고, 마지막 시대의 재림교인들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이다.
VI. “우리 문학”의 계발과 보급
끝으로, “우리 문학”(our literature)을 생각해보자. 화잇 여사는 “선한 사업이 우리 문학의 보급을 통하여 성취되어 가고 있다.”(절제생활, 252)고 말하였다. 여기서 “우리 문학”이란 다름 아닌 “재림 문학”을 가리킨다. 「예언의 신」의 전반적인 말씀에 비추어볼 때,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 이외의 어떠한 목적을 가진 문학이나 작품도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지는 못한다. 그것은 기껏해야 차선 또는 범상한 가치를 지니는 것에 불과하다.
화잇 여사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 문학의 보급은 주께서 그의 교회에게 세상에 전파하라고 위탁하신 빛을 남녀들 앞에 지시하는 하나의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문서전도 봉사, 16).
“출판물에 의하여 초청과 경고의 기별들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고 주께서 교훈을 주셨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접촉될 수 없는 얼마의 사람들은 우리의 문학으로 말미암아 접촉될 것이다. 현대 진리로써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우리의 서적들과 문서들로부터 밝은 빛줄기들이 비춰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증언, 8:87).
이상에서 화잇 여사가 말하는 “문학(literature)”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학(文學)”이 아니라 “문서(文書)” 또는 “(문자로 기록된) 서적”을 가리킨다. 구원과 경고의 기별이 담긴 문서를 가리켜 “문학”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용하시는 최선의 방법이 문학 즉 문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매우 강조하면서 화잇 여사는 그의 책 <저술가와 편집자에게 보내는 권면>(Counsels to Writers and Editors)의 맨 마지막 두 장에서 “우리 문학”에 관하여 상론하였다(저술가와 편집자에게 보내는 권면, 167-181 참조: “Illustrating Our Literature”와 “Literature in the Closing Work”).
재림교인의 문학활동의 범위는 이제 매우 뚜렷해졌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존재이유와 본연의 사명에 입각한 문학활동만이 그 참된 가치를 발휘한다. 결코 “안일(安逸)의 궁전(宮殿)에 있는 단꿈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진부한 소설가군(小說家群)”(교육, 227)의 한 사람이 되거나 또 하나의 “이교사상(異敎思想)의 우물” 또는 “부패한 고대 이교(異敎)에 근원을 둔 물샘”(상동)을 파놓는 사람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겠다. 오직 사람의 영성을 계발하고, 도덕적 표준을 고양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심화시키는 문학을 즐기고, 권장하며, 나아가서는 창작할 줄 아는 문학가 또는 문학애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화잇 여사의 다음과 같은 권면은 우리가 문학에 대하여 취하여야 할 태도의 단면을 제시한다.
“젊은 남녀들이여, 그대에게 참된 지식을 주고 전 가족에게 도움이 될 문학을 읽으라. 그리고 확고히 이렇게 말하라. ‘나는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봉사하는 일에 나를 단지 부적합하게 만드는 독서를 위하여 귀중한 순간들을 결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드릴 봉사를 위하여 적합한 자질을 획득하는 일에 나의 시간과 나의 생각들을 바칠 것이다. 나는 천박하고 죄악적인 사물들에 대해서는 나의 눈을 감을 것이다. 나의 귀는 주님의 것이므로, 나는 원수의 미묘한 합리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음성은 하나님의 영의 감화 아래 있지 아니한 어떤 뜻도 결단코 좇지 아니할 것이다. 나의 몸은 성령의 전이므로 나의 존재의 모든 힘은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함에 바칠 것이다.’” (증언보감, 3:104).
재림교인들은 모름지기 선지자의 권면을 따라 문학을 창작할 때나 감상할 때, 가장 건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쓰거나 읽는 모든 글이 일률적으로 신앙적인 것이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심성을 순화시키고 지성과 감성을 함양하는 글, 예술적 감각과 문화적 양식을 북돋우어 주는 글, 그리고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하거나 생활의 지혜를 표현하는 글은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서적이고 권장해야 할 문학이다. 퇴폐적이거나 선정적인 문학,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현란한 상상력을 선동하여 사람들의 영성을 피폐하게 하는 글은 쓰지도 말고 읽지도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제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문학을 배척하고 멸시하던 시대를 마감하고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을 잘 선별하고, 유익한 문학은 적극 장려하고 생산하여, 우리 자신도 문학이 주는 축복을 향유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지도자로서 꼭 필요한 재능인 “문학적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감을 받은 선지자가 말씀하기를 “장차 문학적인 자질(literary qualifications)을 갖춘 남녀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필요될 것”(그리스도교 교육의 기본, 192)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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