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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청년, 길을 묻다 - 김신섭 교수 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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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2019.04.05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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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감과 거절 당한 사람은 그걸 만회 위해 보상심리 작동”
김신섭 교수는 “상실감과 거절을 겪은 사람은 그걸 만회 위해 보상심리가 작동한다”고 지적했다.
- 전편 이어 - ▲ 상처와 실망 중에서도 저희가 그 안에 담긴 의미와 교훈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상처와 실망을 겪는 중에 의미와 교훈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세빈 양은 인류 최초의 상처는 언제 시작됐다고 생각하나요?

▲ 아마 죄를 지은 순간부터 아닐까요?
- 그래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순간부터 인간은 상처를 받기 시작했어요. 앞서 사랑을 받지 못한 게 상처라고 했잖아요. 그 상처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건 분노로 표출됩니다.

‘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낳은 가인이 동생을 죽였을까?’ ‘얼마나 화가 났기에 살인까지 했을까?’ ‘왜 그렇게 화를 참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깊이 묵상을 하며 가인이 그렇게 끔찍한 살인을 한 사연을 분석해 봤어요.

제가 생각할 때, 그건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양육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거 같아요. 아시다시피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탄의 음성에 더 귀를 기울여 선악과를 따 먹었죠. 그런데 범죄한 이후부터 그렇게 사랑했던 부부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상처를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랑으로 낳은 첫 아들 가인을 양육하면서 아들에게도 상처를 준 거라고 생각됩니다. 상실감과 거절을 당한 사람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보상심리가 강하게 작동하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는데, 아담과 하와는 가인이 자신들을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게 할 ‘메시야’로 생각하고 가인에게 ‘집착’한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간섭하고, 잔소리하고, 아벨과 비교하는 등... 그러다보니까 가인은 사랑을 받지 못한 상처로 인해서 분노가 쌓였던 거죠.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니까 마침내 그 분노가 폭발하여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온 이후로 에덴의 가정부터 행복은 깨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급속도로 불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문제와 인간관계의 갈등은 가정에서 발생합니다. 그 근원을 잘 파악해보면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문제를 돌이켜 보면 각자 원가족의 문제일 때가 많아요. 또 부모의 문제죠? 계속 위로 올라가면 누가 있을까요? 아담과 하와, 하나님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결국은 ‘죄’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부터 인간에게는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것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오늘날의 인간사회가 이처럼 악하고 힘들게 된 거죠.

이것을 다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죄의 문제부터 먼저 해결하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죄는 ‘관계의 단절’이요, 구원은 ‘관계의 회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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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걸 아는 게 필요합니다. 인간도 ‘관계적 존재’라는 거죠.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보통 형상이라고 하면 외모를 많이 생각하는데, 형상의 진짜 의미는 ‘품성’이에요.

다시 한 발 더 들어가서, 하나님의 품성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하나님이 왜 세 분이어야 하나요?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사랑은 둘 이상의 관계에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려면 사랑을 나눌 대상이 존재해야 하죠. 그래서 하나님은 ‘복수’로 존재하시는 겁니다.

그 ‘관계적 존재’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관계적 존재’인거죠.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행복해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니까,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지게 되어 결국 이 세상에는 온갖 불행한 일들이 생기는 겁니다.

▲ 그렇다면, 상처를 다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겠네요?
- 물론이죠. 결국 복음이란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삼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맺고 행복하게 계시는가를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도 그렇게 살면 행복한 삶으로 회복되리라 믿습니다. 네 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세 분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셨습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존중하신 거죠. 세 분이 서로 존중하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도 그 모본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처럼 존귀한 사람으로 존중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이 한가지만 실천해도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가정에서는 가족들을 서로 존중하고, 직장이나 교회에서도 모든 사람을 하나님처럼 존중하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바로 천국을 맛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이 우주에는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어요. 인간에겐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7~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나와 있어요. 새번역 성경에는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풀어 놓았습니다. 우리에겐 사랑이 없으니까 사랑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온전한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을 줄 수 없어요. 왜 우리가 하나님을 꼭 믿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참 사랑을 알아야 하니까. 사랑해야 행복하니까.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사랑을 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상처를 치유받고 온전히 회복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News_9145_file3_v.png세 번째는 세 분 하나님이 서로 완벽히 협력하셨다는 겁니다. 한 분이 무언가를 제안하면 언제나 서로 맞장구치시며 동의하셨을 겁니다.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시고, 협력하셨겠지요. 우리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어떤 제안을 하든지 일단 의견을 존중해주는 겁니다. ‘참 좋은 생각이시네요.’ 혹시 그 제안이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짜증내지 않고, “그래? 참 좋은 생각인데... 이런 방법은 어떨까?라고 존중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다시 표현한다면 서로가 갈등이 생길 일이 없겠죠.

네 번째는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거죠. ‘조화’를 이룬다는 말은 ‘하나 됨’(oneness)을 의미하는 거죠. ‘일체(一體)’라는 말입니다. 세 분의 하나님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협력하고, 사랑하니까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거잖아요.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최초의 공동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이 땅에서 최초의 공동체는 가정이고, 그 가정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네 가지 특성을 그대로 따라 한다면 교회는 회복되리라 믿습니다. 반대로, 만약 실천하지 않는다면? 개인, 가정, 그리고 교회도 불행할 것입니다.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신데, 정작 교회 안에서 서로를 온전히 위로하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면으로는 위로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거 같기도 합니다. 상처로 신음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 ‘사랑만이 사랑을 낳는다’는 말이 있어요.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사랑을 줄 수가 없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만 주고,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만 줘요. 위로도 마찬가지에요. 진정한 위로를 받아본 사람이 남을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어요. 위로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위로를 해야할 지를 모릅니다.

잠깐 제 개인적인 이야기 좀 할게요. 돌아가신 제 아버지는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셨어요. 그런데 무척 엄하셨죠. 생활면으로는 부지런하시고, 신앙적으로는 너무나 철저하셨죠. 그런데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얼마나 많이 야단을 맞았는지 몰라요. 칭찬에는 아주 인색하셔서 아무리 잘해도 칭찬은 별로 하지 않으세요. 저는 매 맞고, 혼나고, 고함치시던 아버지의 모습만 기억나요.

그런데, 참 희한한 건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나의 사랑하는 아이에게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거예요.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설혹 잘못하거나 실수했으면 사랑으로 다독여줘야 하는데, 위로가 아니라 야단을 치고 혼을 내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 스스로 ‘어, 내가 왜 이러지?’ 하고 깜짝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제가 심리를 공부하고, 상담을 받으면서 치유되니까 ‘아, 나의 이런 성격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구나. 내가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게 이렇게 드러나는 구나’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고백컨대, 제가 아들에게도 제대로 사랑을 주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데, 맨 마지막에 사랑한단 말을 썼다 지웠어요. 닭살이 돋아서 못하겠더라구요.

이유가 뭐겠어요? 내가 자라면서 아버지께 사랑한단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대개 상처가 많은 사람은 성장과정에서 상처만 많이 받았지,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을 연습하고, 위로를 연습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장 3-7절에 보면 ‘위로’라는 단어가 열 번이나 나와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과 성도들이 하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부모님세대가 위로를 받아야 해요. 치유를 받아야 해요. 그분들도 상처를 많이 받으며 성장하셨을지도 모르잖아요. 우리 공동체가 이렇게 상처가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 부모세대가 상처가 많다는 증거입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계속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쉬워져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에게도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News_9145_file4_v.png▲ 신앙에 감동이 없다고 호소하는 재림청년들의 목소리가 요즘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데요. 저희가 어떻게 해야 신앙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 AY의 표어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입니다. ‘강권하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엄청나게 ’매력적‘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매력 있고, 좋아서 저절로 이끌려간다는 겁니다. 그게 참된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의 신앙이 매력 있어야 해요. 우리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의 모습을 보면서 ‘와~ 정말 행복하게 사시는구나’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반면, 감동이 없다는 이야기는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과 같아요. 어렵게 교회에 왔는데, ‘이런 것 저런 것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듣다보면 기운이 빠지지요. 더 이상 교회에 나오고 싶지 않지요. ‘넌 우리 교회의 자랑이다’ ‘네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격려와 지지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 게 우리네 현실 아닙니까? 이렇게 긍정적인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주고, 서로의 관계에서 감동을 느끼니까 교회 다니는 게 행복해지죠.

사랑과 위로에도 연습이 필요하듯, 감동을 받으려면 결국 감동을 주는 연습을 해야 해요. 어른들이 이러한 감동을 청소년들에게 주시면 가장 좋죠.

세빈 양은 은행통장이 있나요? (네)
통장을 왜 만들어요? (저축도 하고, 필요할 때 쓰려고요)
통장에 돈이 많아요? (아뇨. 많지는 않아요. ^^;)
많을 때와 적을 때 기분이 어떻게 달라요? (많을 때는 든든하고, 적으면 약간 초조하죠)

자, 이처럼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감정은행의 통장이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대아(對我) 은행계좌’,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대인(對人) 은행계좌’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대신(對神) 은행계좌’가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통장 안에 사랑이 꽉 차 있으면 너무너무 행복하죠. 설혹 누가 기분 나쁜 말을 해도 대수롭지 않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감정은행의 통장이 텅 비어 있으면 별 거 아닌 일에도 짜증이 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어긋나기 쉽습니다. 은행계좌에 잔고가 비어있으면 초조한 것처럼, 감정의 통장이 부족하게 되면 우리는 불안해지지요.

사람은 서로 아는 순간부터 ‘대인관계’라는 통장이 생겨요. 서로 친절을 베풀고, 사랑한다거나 고맙다는 표현을 자주하면 관계회복이 증진됩니다. 반대로 감정통장에 잔고가 바닥나면 쉽게 화를 내거나 갈등이 생기는 일이 많게 되죠. 서로의 감정통장에 입금을 해주면, 자존감이 높아지게 되고 여유가 생겨서 자연스럽게 타인을 도울수 있는 힘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통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자주 묵상하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과의 신뢰가 쌓입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지 않거나 말씀을 멀리 하거나 혹은 교회에 제대로 가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분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돼 있습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하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분들과 관계통장에 사랑을 예입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세요. 만날 때마다 미소지으며 인사하는 작은 행동이라도 반복하게 되면 어느 새 감정은행계좌에 입금이 되어 다시 좋은 관계로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이 3가지 감정은행계좌를 잘 관리하여서 감동이 없는 세대에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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