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합회 비석 세운 왕아시·왕대아 선교사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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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거린, 루푸스 콘라드(Rufus Conrad Wangerin)
우리에게 ‘왕아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왕거린 선교사는 1883년 11월 11일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진리를 발견하고 재림교회에 입교했다. 전도사로 활동하던 중 1909년 테오도라 샤펜버그와 결혼했다.
선교사를 요청한 조선미션 총회의 부탁에 따라 결혼 후 한 달 만인 1909년 10월 18일 ‘미지의 땅’ 조선에 발을 디뎠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무력 통치하던 엄혹한 식민시대였다.
왕아시 선교사는 당시 4개 선교지역 중 영남, 충청, 호남, 제주를 관할하는 남선지역 책임자로 임명됐다. 1911년 경산읍 성암산 자락에 선교본부를 건축하고, 30명의 교인으로 안식일학교를 조직했다. 건물도 없이 허허벌판에 천막을 치고 시작한 사역이었다.
남선지역에 재림교회의 기초를 놓았던 그는 1915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해 한국에서 낳은 사랑하는 막내딸 메이블을 병으로 잃었다. 경산의 어느 이름 모를 야산에 딸의 시신을 안장하며, 부부는 인간적 슬픔과 고통을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교사명을 묵묵히 감당하기로 다짐했다.
1916년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이듬해 6월 1일 아내와 두 아이를 남기고 주님 품에 잠들었다.
■ 왕대아, 테오도라 샤펜버그(Theodora Scharffenberg Wangerin)
1888년 12월 17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출생했다. 한국 재림교회 최초 여성선교사이자 여성교육 창시자인 미미 샤펜버그 선교사의 친동생이다.
부모님을 따라 12살 때부터 재림교회에서 성장했으며, 왕아시 전도사와 결혼한 후 남편을 따라 선교사로 내한했다. 1917년 왕거린 선교사가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자 두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남편의 선교사역을 이어 봉사했다.
1919년부터 여러 부서의 서기로 일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확전과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1940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난 1947년 한국으로 복귀해 시조사 편집장 직무를 수행했다. 특히 발행이 중단됐던 <시조>를 복간하고, 성경통신학교를 조직해 한국 재림교회 선교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1909년 한국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한 후 1952년 은퇴해 본국으로 귀국하기까지 그는 36년 동안 한국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한국에서 사역한 역대 해외선교사 중 가장 긴 기간이다. 1978년 3월 19일 캘리포니아주에서 89세를 일기로 부활의 소망을 안고 주 안에 잠들었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조선’을 위해 아낌없이 수고하고 헌신한 이들의 희생의 대가로 한국에는 여전히 세천사의 기별이 힘있게 전파되고 있다.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역사지만, 현재에 남아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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