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봉이 들리는 순간, 음표는 예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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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쁨 명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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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02.2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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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기자 권기쁨 양, 차세대 마에스트라를 만나다
‘솔티 콩쿠르, 말러 콩쿠르에서 연달아 우승한 한국 출신 여성지휘자’
‘금녀(禁女)의 벽 깨고 상임지휘자에 도전하는 여풍의 선두주자’
언니를 처음 알게 된 건 이 같은 언론보도를 통해서였다. 이후 그가 신실한 재림신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관심을 갖고, 언니의 음악세계를 관찰하게 되었다.
얼마 전, 그가 1년여 만에 자신의 한국 무대 데뷔 파트너였던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다.
‘뉴 웨이브 시리즈’의 첫 주자로 지휘봉을 잡는 언니의 모습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공연은 음악회 이전부터 국내 클래식 음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던 터였다.
공연을 앞둔 19일 저녁,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음악회 당일에는 가급적 언론과 접촉하지 않는 언니지만, <재림마을>이라는 이름 하나로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대기실에서 만난 언니의 실제 모습은 평소 포스터나 사진에서 봤던 남성 못지않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미국 5대 교향악단 중 하나인 보스턴심포니의 명지휘자라는 ‘포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교회선배 같은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이었다.
언니는 “작년에는 첫 무대여서 많이 긴장했지만 이번에는 어느 정도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며 대화를 시작했다.
시벨리우스의 ‘포욜라의 딸’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그리고 버르토크의 ‘중국의 이상한 관리’ 등의 곡이 연주된 이날 공연에서 언니가 지휘자로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어떤 점일까 궁금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근대나 현대 곡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하지만, 현란하고 극적인 리듬과 매혹적인 불협화음 등 익숙하지 않은 멜로디가 새로운 흥미를 전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동양인 최초의 여성지휘자’라는 수식어 등 세계 음악계에서 여성지휘자로 주목받고 있는 주인공으로서 그녀는 자신의 음악적 목표에 대해 “어느 무대에 누구와 서든 최선을 다하는 음악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언니는 “유명하거나 명예로운 사람이 아닌, 많은 이들이 나의 음악을 통해 감동을 받고 기쁨을 나누는 음악가로 기억되길 바란다”며 ‘순수한 음악의 메신저’가 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여성 진출과 활약이 저조한 클래식음악의 지휘 분야에서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비주류의 장벽을 딛고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권위적 차별을 무너뜨린 신예 거장의 대답치고는 오히려 소박하고 겸손한 답변이었다.
언니는 음악가가 되기를 희망하며 준비하는 재림교회의 청소년들에게 “신앙이 없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중요한 밑바탕이 빠져 있는 것 같다”며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무얼 하든 항상 성공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일이 뜻대로 잘 안될 때도 있고, 좌절할 때도 있지만 그 길이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이라면 절망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더 큰 그릇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지휘대를 서서히 점령해가고 있는 마에스트라(Maestra)의 미소가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절제된 듯 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에 무대와 객석은 어느덧 하나
짧지만 인상 깊었던 언니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곧 객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튼이 올라가고 무대 위에 선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푸근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깜짝 놀랐다. 등장을 할 때도, 관객들에게 인사를 할 때도, 단원을 소개할 때도 여유 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멋있다!’
나도 모르게 외마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이윽고 연주가 시작됐다. 지휘자의 몸짓은 유려했다. 그의 손끝을 타고 흐르는 선율은 때론 폭풍처럼 휘몰아치듯 격정적으로, 때론 어둡고 우울하게, 때론 살랑이며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잔잔하고 부드럽게 공간을 휘감았다.
지휘봉이 들려지는 순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다. 여성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과 인내심, 부드러운 소통능력은 단원들의 음악적 역량을 한곳으로 모으기 충분했다. 악보에 쓰여 있는 음표가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경쾌한 리듬, 그러나 간단하지만은 않은 화음, 불규칙하게 포효하는 불협화음까지. 절제된 듯 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그의 지휘에 여러 음색들은 어느새 서로 하나의 선율로 어우러졌다.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등 오케스트라 모든 영역의 악기는 일순 최상의 화음으로 빚어져 춤을 추듯 그의 지휘봉을 타고 넘었다. 지휘자의 섬세한 인도를 따르는 단원들의 호흡이 객석까지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 했다.
새삼 ‘숨이 멎는 것 같다’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을 만큼 120분간의 눈부신 연주는 아름다웠다. 탁월한 리더십으로 단원 개개인의 역량과 다양한 악기들의 조화를 그려낸 지휘자에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아낌없는 박수갈채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넓게 조형된 구축미, 빠른 속도의 오페라적 움직임, 능란하게 조탁된 디테일을 갖추었다. 그녀의 바톤은 우아하면서도 계산된 것이었다.(보스턴 글로브)”
“우리가 성시연의 활약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혜성처럼 나타난 유망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한국 클래식 음악의 미래를 좌우하는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정명훈 이후 한국 클래식에 새롭게 등장한 희망이다(헤럴드 경제)”
이러한 언론의 찬사와 평단의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와 같은 재림교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밤이었다.
지난 주말 귀국했던 언니는 짧은 방한 일정을 마치고, 20일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보스턴심포니 부지휘자로 연중 절반 정도는 보스턴에서 체류하고, 나머지 기간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서의 연주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도 조만간 다시 찾을 것 같다고 했다.
여성이자 동양인이라는 편견과 차별의 시선을 깨고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워가고 있는 ‘마에스트라’ 성시연 언니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더욱 기대가 모아진다. 우리가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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