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의명학교 출신의 교육가 허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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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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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3.0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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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 ... 유언 따라 망우리공원에 묘소
3.1운동 제102주년을 지나며 의명학교가 배출한 또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 발굴돼 사회적 조명을 받고 있다.
주인공은 추담 허연(許然) 선생. 그는 1896년 평안남도 순안군에서 출생했다. 1908년 러셀 박사가 의료선교사로 봉사하던 순안병원에 침식을 제공받는 급사로 들어가면서 재림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곁에서 조수로 일하며 영어와 병원 업무를 배우던 중 1926년 러셀 박사의 주선으로 20세의 늦은 나이에 순안의명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병행했다.
1919년 3월 6일 의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순안 만세운동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경찰의 체포를 피해 스승 김창세의 추천장을 들고 상해로 망명했으며, 그해 상해 삼육대학(중학부)에 입학했다.
이즈음, 일경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어릴 때 이름이던 용성 대신 허연으로 개명했다. 이름을 바꿔준 이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한 항일독립운동가 김규식 박사다.
1922년 상해 삼육대를 졸업한 그는 귀국해 경성연희전문에 입학했다. 2년 뒤 미국으로 건너가 과수원, 호텔 식당 등에서 일하며 학비를 모아 김규식 박사의 추천으로 로노크대학에 편입했다. 1929년에는 펜실베이니아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으며, 1932년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뉴욕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그의 흥사단 입단을 권유한 것도 의명학교 동창인 한승인이었다. 1933년 귀국해 협성실업학교(현 광신고)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이듬해 김귀애 여사와 결혼했다.
1937년 6월 10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누하동 자택에서 긴급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며 1년2개월 동안 복역한 후 출소했다. 일경은 조서에 “조선 독립을 궁극적 목적으로 결성한 미국의 흥사단, 조선의 수양동우회에 가입해 수차례 회합하고, 협성실업학교의 상업전수과를 동우회 지도아래 두는 등의 활동을 했다”고 적시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일제가 수양동우회에 관련된 181명의 지식인을 검거한 사건. 당시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가 각 지부에 기독교인으로서 독립에 이바지하는 방법을 담은 문서를 발송한 게 일경에 발각되면서, 그 배후를 밝히려는 과정에서 동우회가 수사망에 들게 됐다. 이에 안창호를 비롯해 이광수, 김성업 등 동우회의 지역 지부 대부분의 회원이 검거됐고, 재판 끝에 적게는 2년, 많게는 5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허연 선생은 해방 후에도 흥사단 국내 위원부의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민족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49년 일제 때 옥고의 후유증(폐렴)으로 병석에 누웠으며, 그해 8월 12일 향년 5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도산 선생의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가족들은 망우리에 묘지를 마련했다.
허연 선생의 이런 행적은 그간 교단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아 왔다. 단지 지난 2016년 한국삼육고등학교 개교 11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동문회장이었던 정성화 장로가 회고담에서 “의명학교 출신(3회, 4회) 독립운동가인 최경신, 허연, 강봉호, 이면식, 유영순 선생 등 선배들이 흥사단원으로 활동하며 상해 임시정부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고 짧게 언급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최근 김영식 작가가 한국 기독교 역사의 발자취를 담은 책 <망우리 언덕의 십자가>를 출간하며 도산 안창호 선생,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 참여한 박희도 목사, 조선국민회 결성의 주역인 애국지사 서광조 선생 등과 함께 허연 선생을 순안의명학교 출신의 재림교 교육가로 소개하면서 주목을 받게 됐다.
김영식 작가는 이 책에서 “의명(義明)학교는 1906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선교부가 순안에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는 재림교 최초 선교사 스미스가 취임하였다. 1949년 함경남도 요덕군으로 이전하고 전쟁 후 1952년에 서울 청량리로 이전하였다. 청량리 지역에는 재림교 한국본부와 출판사 시조사, 삼육서울병원이 모여 있어, 한국 재림교의 발상지는 순안이고 중흥지는 청량리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의명학교는 삼육중고 및 삼육대학의 전신으로, 삼육은 지·덕·체를 육성한다는 교육이념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1921.12.26.)은 1921년 12월 13일 3·1예배당에서 열린 상해유학생회(留滬學生會)의 모임을 소개하며 허연, 주요섭, 박헌영의 연설 소식을 실었다. 독립운동의 주역이 될 조선청년들의 상해유학생회는 당연히 임시정부가 깊게 관여하여 이때 허연은 우사 김규식(1881~1950)과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허연 선생은 뚜렷한 독립운동 족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가 추서한 애국지사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김영식 작가는 이에 대해 “고인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것과 젊은 시절 상해에서 임시정부 김규식 선생의 지도하에 임정 국채의 판매 등 활동한 경력을 들어 유족은 30여 년 전 서훈을 신청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 보훈처의 심사 태도에 분개하여 이런 심사나 서훈은 돌아가신 분에 대한 모욕이니 받지 않겠다고 가족이 결의했다”고 언급했다.
허연 선생은 의명학교가 배출한 또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자 오랫동안 잊혔다 되찾은 신앙의 유산임이 틀림없다. 민족의 격동기와 숨결을 함께 한 의명학교가 남긴 올바른 역사인식과 정신을 오늘에 되새기고 기려야 할 이유가 되고 있다.
■ 허연 선생 묘소 찾아가는 길:
망우리공원 구내 시인 김상용 묘역을 지나면 지석영 연보비가 나온다. 다시 순환로를 100여 미터 올라가면 길가 왼쪽에 회양목이 20여 미터의 폭으로 식재된 곳 직전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30여 미터를 내려가면 오른쪽 아래에 검정 사각 비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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