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지금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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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춘 목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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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7.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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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19 시대, 공중예배 어디로 갈 것인가?
■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국가와 대륙을 넘나들며 세계의 경제와 사회, 문화, 교육, 생활 전반에 걸쳐 새로운 국면을 가져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월, 천주교가 사상 처음으로 미사를 무기한 중단했고, 이어 불교도 법회를 전면 중단했다. 다수의 개신교 교회도 현장예배 대신 온라인예배를 드리는 등 종교계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 초기에 일부 교회가 현장예배를 드리고, 교회 모임을 통해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크고 작은 문제로 사회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물론, 바이러스의 확산이 종교집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사람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종교집회의 특성상 각종 종교모임이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비대면, 비접촉 시대, 교회의 고민도 그만큼 깊어지는 모습이다.
■ 교회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것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교회의 가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변화는 현장예배의 중단 혹은 축소 운영일 것이다. 필자는 현장예배의 운영과 관련해 교회 안에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것을 본다. 일부에서는 현장예배의 중단과 온라인예배로의 전환을 믿음의 문제에 결부시키기도 하고, 반대로 현장예배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 등 성도들의 의식 속에서 교회의 공공성과 고유성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한다. 쉽게 말해 ‘신종 바이러스로 인한 심각한 전염병이 돌고 있는데, 과연 교회가 예배드리기 위해 물리적으로 모여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다. 본질과 해법을 동시에 고민하게 하는 문제이다.
우선,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성경은 모든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간 바이러스가 죄악이라고 말한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첫 인류 아담과 하와가 죄악에 감염되어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직후에 짐승의 가죽옷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리셨다(창3:2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악의 희생제물이 되실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롬 3:25). 사탄에게서 시작되어 모든 인류가 감염된 이 죄악의 질병의 유일한 백신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출 15:26, 사 58:8, 살전 5:9).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살길, 이것의 출발이 제단이었고(창 4:4, 창 8:20, 창 22:2) 광야성소(출 25:8)와 성전(대상 29:3, 시 5:7)으로 이어졌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위하여 ‘불러냄을 받은 무리’ 즉, ‘교회’가 되었는가? 근본적인 이유는 예배하기 위한 것이었다(출 5:1, 3, 8, 17, 출 7:16, 출 8:1, 25, 28, 29).
여전히 ‘불러냄을 받은 무리’인 ‘교회’의 본질은 예배에 있다. 그리고 예배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코로나19로 5개월 동안 전 세계에서 5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생명을 잃었고, 지금도 1000만 명이 넘는 환자가 고통 받고 있다.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야 할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겨야 할까?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교회의 본질은 예배이고, 예배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 예배의 본질은 사랑하는 것
코로나19 사태 초기,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의 현장예배가 중단됐을 때 홀로 예배당에 앉아 기도하며 울던 한 성도의 눈물을 기억한다. 필자도 함께 울었다. 원치 않는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한 동정의 눈물과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해 안타까운 통회의 뜨거운 눈물이 같이 흘렀다.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가 교단의 권고에 따라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일시적으로 현장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예배로 전환한 이유는 특별히 지역의 안전과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함이었다. 그러한 사태의 특수성을 인지하고 심각 단계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충돌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 후, 일별 확진자가 감소 추세를 보이면서 교회의 현장예배를 단계적으로 재개했을 때, “방송으로 예배드리다가 교회에 오니 너무 좋다”며 함박웃음을 짓는 성도들의 고백을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조심스럽지 않느냐”는 걱정스런 의견도 있었다. 확진자가 50명 안팎을 오가는 지금, 현장예배의 운영 수위를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각 교회가 처한 상황에 맞게 운영해 나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는 현재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 식사나 각종 활동을 자제하고 철저한 방역 속에 2부제 예배와 온라인예배를 병행하고 있다. 지금은 각기 다른 교회의 선택과 개인의 선택을 함부로 비난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필요하다. 그 통일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은 사랑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계셨다면 무엇을 하셨을까?
1527년 독일에서 흑사병이 재발병하여 2주 만에 18만 명이 사망하고, 도시가 봉쇄됐을 때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소책자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집과 마당과 거리를 소독하라. 사람과 장소를 구별하라. ...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다. 약을 조제하여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 불청결로 이웃이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 지금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코로나19의 지속 양상이 국가별, 지역별로 각기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감염속도와 사망률도 천차만별이다. 앞으로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지막 때에 관한 성경의 예언은 아직 모두 성취되지 않았고(계 7:1), 앞으로 더욱 극심한 재난과 질병이 더 자주 찾아온다는 것이다(눅 21:11). 노아의 때와 같이 이 땅은 갈수록 죄악의 바이러스가 창궐할 것이기 때문이다(창 6:5).
어쩌면 교회의 현장예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 혹시 아는가? 어떤 이유로 온라인예배마저 드리기 어려운 상황이 올지. 물론, 과도한 예측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는 끊임없이 교회에 질문하고 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인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사회와 거리를 두며 홀로 우물가로 나왔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셔서 그녀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1, 23)
코로나19 시대, 어쩌면 예수님의 재림의 나팔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리는 듯하다. 교회는 ‘창조주를 경배하라’(계 14:7)는 우리의 믿음의 해답을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하나님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빌 2:8) 생명을 살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더욱 뜨거운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할 때이다.
#특별기획시리즈 #Stop에서Step으로 #코로나임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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